두 딸과 함께 한 3박 4일 동안 다녀온 타이페이다. 가족들과 국내여행이야 많이 다녀봤지만, 해외여행은 베트남 이후로 처음이다. 그것도 남편없이 두 딸들과만 다닌다니 약간 부담스러웠다. 길게 가는 여행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처음 가는 도시인 만큼 준비해야 할 게 많은 터였다. 나의 모토는 경비는 엄마가 대지만 나머지는 다 너희들이 준비하라는 거였다. 물론 표면상으로 내세운 핑계는 내가 직장 일로 바빠서 여행에 신경쓸 틈이 없다는 거였고 속마음은 이제는 너희들도 다 컸으니 여행 준비부터 숙소나 일정은 알아서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얼만큼 컸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당연하다고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자신들의 속내를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여행 준비가 어느 만큼 진척되고 있는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서로 시간을 맞춰 잡은 비행기표 예약 이후로 여행에 관한한 감감 무소식이었다. 숙소는 어떻게 되가는지, 여행자보험은 가입했는지, 타이베이에서는 어디를 가는지 전혀 말이 없었다. 타이페이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우리 세명의 단톡방을 만들었지만, 거기에서는 그야말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고 있었다. 혹시 나를 믿고 아무런 준비도 안하는 것은 아니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천하태평인처럼 보였다. 바쁜 자신들의 일과 관심사에만 신경이 가 있어서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괘씸했다. 나와의 약속을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하는 게 말이다. 속으로는 부글 부글 끓기 시작했다. 왜 나와의 약속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지 속이 다 상하기까지 했다.
여행 바로 전날이다. 내일이면 출발이다. 출발 하루 전, 일요일 오후가 막 되어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다 같이 거실에 모였다. 4명 밖에 안되는 가족이지만 한 날 한 시에 한 장소에 모이는 것도 참 어렵다. 각자 일정이 있는데다가, 집에 있어도 자신의 방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에 거실에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TV 를 바보 상자라 하며 거실에 두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게 엊그제 인데, 요즘은 그거라도 있어야 그나마 가족들이 서로 한마디씩이라도 거들며 대화의 소재가 된다. 언감생심이다. 각자 시청하는 ott도 다르고, 드라마나 영화의 취향이 달라서 그것 또한 점점 어려워진다. 이번에는 여행이라는 같은 목적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거실에 모였다. 이때야 말로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켰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싶어 대대적인 점검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여행자 보험은 어떻게 됐을까?~~" 하고 최대한 부드럽게 큰 아아이에게 물었다. 내 예감을 그대로 드러냈다가 민망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데이타가 많이 쌓여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 예감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함부로 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하지만 바빠서 아직 준비가 안되어있다는 답을 대비한 나의 날카로운 한마디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응, 삼성에 가입했어."/ "아니 어떻게 가입했는데?"/ "네이버 보험에 들어가니까 여러 보험을 비교해주더라. 그래서 가장 저렴한 것으로 가입했어"?/"이미 했구나. 그럴 줄 알았어. 보험 가입 링크만 단톡방에 공유해줘"/ 응./
내 경험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겉만 보고 아이의 속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단톡방이 시끄럽지 않다고 아무 일도 진척되지 않는다고 말을 할 순 없다.
그래도 혹시하는 마음에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숙소는 어떻게 됐니? "/ "에어비앤비에서 잡았어."/"방은 몇갠데?"/ "세개"/"화장실은?"/ "그것도 두개"/ "역에서는 가깝니?"/ "응, 시먼딩 역에서 2분 거리야" /"그럼 그 숙소도 단톡방에 링크 좀 걸러 주라"/ "응"
타이페이에는 호텔이 많다. 하지만 크기가 작다. 33㎡이라 세명이 지내기엔 좁은 편이다. 좁은 이유는 우리가 서로 생활하는 시간대가 다르기에 한 방에서 세명이 지내기가 서로가 불편하다는 의미이다. 작은 아이는 주로 새벽까지 깨어있는 편이고, 큰 아이는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나 역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잠귀가 밝아졌는지 작은 아이가 새벽까지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며 걸어다니는 소리며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에 깬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호텔에서 침대 세개를 나란히 두고 잠을 잔다면 서로의 영역을 너무 침범하게 된다. 할 수 없이 방 두개를 잡아야하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나의 이런 모든 걱정을 한 순간에 해결한 것이다.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잡은 것이다. 아이가 링크해준 숙소를 들여다보면서 후기를 꼼꼼히 읽어봤다. 시먼딩역에서 2분거리가 장점이다. 숙소가 조용하고, 화장실이 두개이고, 방이 세개나 있다. 물론 거실도 따로 있다. 우리 세 모녀의 각자 다른 생활 리듬에 적합한 구조다. 역시 여행 준비가 안되어간다고 생각한 건 나의 기우였다.
또 물었다.
/"그럼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어떻게 갈거니? 캐리어를 줄줄이 끌고 대중교통을 타긴 좀 그렇지 않니?"/
사실 내 어깨가 안좋다. 5년 전에 갑자기 오십견이 왔었다. 자고 일어나니 어깨를 움직일 수 없었다. 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악'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시에 좋다는 정형외과 순례를 시작했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두달 정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우연히 인터넷을 하다 서울대 정선근 교수가 최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대 병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정형외과 정선근 교수의 스케줄을 봤다. 정말 운이 좋게도 한 달 후에 아침 첫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예약을 취소한것 같았다. 아침 첫 자리였다. 아침 첫 자리라는게 마음에 걸리긴했지만, 한 달 후에도 여전히 내 어깨가 아플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아침 첫 자리라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나에게는 구세주 같은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최대한 나에게 유리하게 희망회로를 돌리며 그 자리를 예약했다. 당연히 한 달 후까지 내 어깨의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날 아침 첫 시간에 정선근 교수를 만났고, 그 교수님은 내 어깨 사진을 보더니 레지던트에게 처방을 내렸다. 주사를 한방 놔주라는 것이다. 아마 스테로이드제 주사인듯 싶다. 주사를 놔주며 레지던트는 내일부터 조금씩 아픈게 없어질 것이고 일주일이면 통증이 없어질것이라고 예언을 하듯이 말한다. 그러니 다음 진료를 예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피식거렸다. 아니 두달동안 다른 의사들이 못고친 통증을 무슨 수로 일주일 만에 다 낫게 한다는 건지, 거기다 다른 병원은 어깨 염증을 줄여주는 약도 처방해 줬는데, 여기서는 약도 없다고 하니 돌팔이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워낙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으니 나 하나쯤은 안와도 그만이라는 뜻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 주사를 맞고 정말 거짓말 처럼 오십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건 그 교수님에게 예약을 하려면 2년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난 그날 운이 좋은 거였다. 그 주사이후 어깨에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무거운 짐을 들고나면 아련한 통증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기에 최대한 어깨를 안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캐리어를 끌고 오랜 시간 움직이는 것을 내심 피하고 싶었다. 타이페이의 타오위안 공항에서 도심까지, 도심에서 숙소까지 움직이려면 1시간 정도는 소요된다. 그 사이에 캐리어를 들어 올리는 일은 서너번 반복된다. 그래서 대중교통으로 움직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 "타오위안 공항에서 픽업 택시 예약했어!"/ "그런 것도 있니?"/ "그럼, 클룩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여행 관련 일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데야"/ "..."/
끓어오르려면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행 일정은 다 짰니?"/ "물론"/ "엄마 영어 못하는 거 알쥐?"/영어는 내가 다 하니까 뭐.. ?/
나에게 영어는 애증의 대상이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영어식 표현으로 나와야 하는데 자꾸 콩글리쉬가 나온다. 바디 랭귀지야 뒤지지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멋있는 영어다. 구글 번역기를 다운은 받았지만 아직 실생활에서 써본적은 없었다. 타이페이에서 뭔가 소통을 하려면 이것을 좀 연습이라도 하고 가야하나 싶었지만 아이들을 믿기로 했다. 교환학생까지 다녀왔는데 잘하겠지 싶다.
타이페이 타오위안 공항 도착이다. 나에게 모든 캐리어을 맡긴 채, 큰 아이는 미리 예약한 교통카드용 이지카드를 찾아오고, 작은 아이는 픽업 차량 업체와 대화중이다.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된다. 우리 셋은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아이들은 애어비앤비 숙소를 관리하는 매니저와 소통을 하고 우리는 키를 받고 숙소로 들어갔다. 나의 핑계에서 비롯된 일들을 아이들은 멋있게 리시브하고 있었다. 그 덕에 서울에서 출발한지 서너 시간만에 안전하게 완전히 시공간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