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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Mar 23.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10

외국에서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뉴스레터 운영진으로부터 철학 유학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가 글을 써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시험과 시험 사이의 시간을 활용하여 철학 유학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철학을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건 무슨 느낌인가?


학교 건물로 쓰고 있는 더럼 대성당

나는 영국 북부의 더럼이라는 손바닥만 한 마을에 있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 근사한 성이 있고, 컬리지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다. 철학과 건물은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는데,  백 년 전쯤에 쓰던 우체국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고,  앞에는 크렘린 궁을 연상시키는 호텔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좁은 오피스에 교수들이 겨울잠을 자려고 뭉친 무당벌레처럼 모여있는데 이상하게도  차갑게 식은 요크셔푸딩 냄새가 난다. 벽에는 철학자들의 명언들이 적혀있다. 학교 교수  한 분인 낸시 카트라이트 교수님의 명언도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교수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예약제로 오피스 아워를 제공하는데, 학생들이 예약을 하면 찾아가서  20 정도 궁금한 것을 질문할  있다. 그날 나는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저 멀리 크렘린 궁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호텔 건물이 보인다.


교수님의 이름은 톰이다. 톰 와이맨이다. 정말 Whyman이다. 과연 철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그는 독일 관념론에 관심이 많고, 독일 관념론을 가르치고, <독일 관념론>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독일어에 능통하다. 그는 아도르노가 매력적이지 않게 생겼기 때문에 그의 철학도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을 했다. 나는 아직 학부생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틀림없이 교육으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부분에서 아도르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만, 잘은 모르겠다. 일단 그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생겼다.


닥터 톰 와이맨이라는 명패가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톰 와이맨이 앉아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놓여있다.

“헤이 톰.” 하고 내가 말했다.

“헤어 스캇.” 하고 톰이 말했다.

“이메일 봤어요?” 하고 내가 물었다.

“봤지. 스팸 메일인 줄 알고 지울뻔했지만 겨우 읽었어.”

“좀 상처받네요.”

“질문의 요점이 뭔지 잘 모르겠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한 온라인 존재자에 대한 분석이 뭘 하고 싶어 하는 거지? 요컨대 현상학은 방법론이야.”

“저도 알고 있어요. 그냥 우리가 현상학적 환원을 진짜 할 수 있는가, 그게 궁금한 거예요.”

“글쎄. 물론 한계가 있지. 당연히.”

“그런 것 같아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어디까지 읽었지?”

“아직 후설만 읽고 있어요.”

“퐁티 읽어봐. 한계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어.”

“어떤 책을 읽을까요?”

“유명한 걸로.”




톰 와이맨을 포함하여 대부분 교수님들은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텍스트를 추천하고, 방향을 제공해준다. 한번 사고의 틀에 박히게 되면 오직 그 내부에서만 사유하게 된다는 것이 교수님들이 우려하는 바이다. 사고의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굳이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철학을-내가-함이 아니라 내가-철학을-함의 방식으로 그 안에-들어가서-있음과 동시에 외연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스팸 메일처럼 들리겠지만, 어쨌든 철학이란 그런 식이다.


그렇게 20분이 쏜살같이 지나가면 벌써 다음 타임을 예약한 학생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봐요 톰.”

그래 스캇.”


가끔 토론이나 강연을 한다. 촘스키도 이곳에서 강연을 했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것은 학생의 자유지만, 출석이 미달이면 다음 학년으로 진학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페널티가 부여되는 중요한 세션이 있다. 바로 토론이다. 토론 주제는 일주일 전쯤에 교수가 이메일을 통해 알려 준다. 그리고 중요한 세션인 만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아주 큰 고통을 받는다. 나름 더럼의 학생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공부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의 부족만큼 큰 죄는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토론실에 나선다. 교수님이 들어서면 잠시 침묵이 머문다. 그리고 토론이 시작된다.


교수님은 오늘의 토론 주제가 적힌 종이를 나누어준다. 피터 싱어의 논문의 일부가 프린트되어있다. “오늘의 주제는…… 개를 키우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공리주의자들도 있고, 원칙주의자들도 있고,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지켜야 하는다는 학생들도 있다. 나는 칸트의 간접 의무의 범위에 대해서 말을 했지만, 내 생각을 명확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개를 키우는 것이 과연 허용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다.




토론이 끝나면 모두 토론에 대해서는 전부 까먹은 모양인지, 서로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맥주를 마시러 간다. 매우 영국스럽다. 그리고 가끔 그곳에서 만난 여자애들과 잔다. 보통 이런 식이다.


“안녕.”

“안녕.”

“넌 뭘 공부하니?”

“철학.”

“멋지네. 인생의 의미 같은 거야?”

“아니. 전혀 달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봐.”

“<돈키호테>는 읽어봤어.”

“둘이 무슨 상관이지?”

“상관없어?”

“없어.”

“그렇구나. 너 혹시 오늘 <지미스>가?”

지미스는 더럼에 있는 더럼 학생들을 위한 클럽이다. 여러 가지 술을 판매한다. 무료입장이고 방학 때는 문을 닫는다. 경비원들은 한번 넘어진 학생은 무조건 내보낸다는 원칙을 가지고 일을 한다.

“잘 모르겠어. 너는?”

“난 갈 거야. 내 방에서 프리 하지 않을래?”

프리는 클럽에 가기 전에 술을 마시는 행위이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우리는 별 감흥 없는 섹스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런던에서 왔다. 그녀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난다. 편의상 카레리나라고 부르겠다. 어쨌든 카레리나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고, 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말을 했다. 나는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더 말해줘. 듣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지.”

“어째서?”

“그게 더 옳은 거니까?”

“옳다는 걸 누가 정하는 거야?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을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정하는 거야 결국에는.”

“옳은걸 내가 정한다고?” 카레리나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리고 그게 정말 옳은지는, 두고 봐야겠지.”

“어렵네.”

“맞아.”

“너는 바람을 피워본 적 있어?”

“아니 없어.”

“난 있어. 그게 틀린 일일까?”

“틀렸어. 근데 난 이만 가봐야 해.”

“지미스는 안 갈 거야?”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읽어야 해.”

“얼마나 읽었는데?”

“한 페이지도 안 읽었어.”

“알겠어. 나중에 봐.”


공원에 있는 동상인데, 가끔 술을 마시고 저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는다


 기숙사는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데, 가끔 친구들과 모여서 보드카를 마시고 옥상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밤하늘을 쳐다본다. 더럼은 무척이나 도시에서  곳이라서 밤하늘이 특히나 어둡다. 속이 잠깐 쓰리고 나면 별빛이 일그러지며 기묘한 도형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상태에서 나는 <철학의 문제들> 읽었다. 러셀은 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제를 대답할  없으면, 질문이라도 잘하는 게 철학자의 역할이라고.


어쨌든, 철학을 한다는 건 개인적으로, 우리가 이 신비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름대로, 공학자는 공학자의 방식대로, 수학자는 수학자의 방식대로, 물리학자는 물리학자의 방식대로 잘하고 있고, 나도 나름 철학자의 방식대로 잘해나가고 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철학을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무슨 느낌인가?  대한 대답은, 결국 그것은 별로 특별할  없이 내가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하는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이나 원래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떨어져,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것은 커다란 도전이다. 하지만  속에서  내가 새로운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 (철학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에 대하여) 계속 놀라움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에 그럴 자신이 없다면, 혹은 적응할 자신이 없다면, 굳이 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에 메리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당신이 석사나 박사를 노린다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어디까지나 -실존적인 범위에서의- 느낌이다. 정말 내가 그만큼 철학을 사랑하는가? 내가 정말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의 마음속 호기심으로부터 놀라워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질문에 대해서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있는가?


칸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그것에 대해서 더 자주 끊임없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로워지고 점점 더 커지는 경탄과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로 가득 찬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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