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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Mar 30.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11

주희의 성선론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性(본성)은 순수하게 선하다." 이것은 성리학자인 주희에게 있어 양보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런데 본성이 순수하게 선하다는 주장은 우리가 경험하는 비도덕적 사태에 대한 해명을 어렵게 합니다. 만약 본성이 순수하게 선하다면 도대체 어디서 악이 유래된다는 말인가?


현대 연구자인 이찬은 주희의 성선론을 메타-윤리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맹점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주희가 본성이 선하는 표현을 통해, 자연 질서의 전제된 완벽함을 지시할뿐만 아니라, 그 자연 질서를 도덕적 행위와 판단과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주희의 성선설은 존재를 가치의 근거로 삼고 있는 자연주의적 도덕관이지, 비도덕한 사태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태가 악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은 이미 본성으로부터 무언가가 드러난 후의 일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 사물의 법칙 내지 본성이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에 해당할 것입니다. 성리학적 이해에 따르면, 악은 다만 사물의 법칙 내지 본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상태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 결과가 본성의 본래 그러함과 다르더라도, 그 때문에 본성이 본래 그러함에 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이찬의 지적대로, 마치 자연의 본래 그러함 내지 자연의 본래 완전함을 형용하는 것이지, 본성으로부터 항상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겠지요. 악의 원인은 본성이 아닌 다른 것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품부받은 기질(氣)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성리학적 이해에 따르면, 본성은 리(理)이고, 리는 본연의 완전함을 갖춘 것이기 때문에, 기 차원에서 온전히 드러나지 않더라도 여전히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본성이 실재 상에 드러났을 때는 항상 기와 더불어 있기 때문에 본성의 온전함이 그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본성 그 자체로 보았을 때는 온전함을 잃지 않기 때문에, 과불급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항상 기능할 수 있습니다. 본성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여 과불급이 없는 상태, 즉 그 중(中)에 도달했을 때, 사태는 본성과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선하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비해 기질의 영향으로 그 중(中)을 잃으면 사태는 악으로 흘러버린 것으로 평가되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주희가 자연적으로 주어진 질서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규정하면서 지극히 선하다고 평가하는 본성에는 몇 가지 구체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희가 단순히 자연적이라고 해서 선하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보기 보단, 선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희는 계사전에 나오는 ‘그것을 계승하는 것은 선이다. 완성하는 것은 본성이다’이라는 구절를 다음과 같이 풀고 있습니다.


“‘그것을 계승하는 것은 선이다’는 낳고 또 낳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양에 속한다. ‘완성하는 것은 성이다’, ‘각각 그 성명을 바르게 한다’의 뜻은 음에 속한다. (중략) 예컨대 ‘순수지선’이라고 말한 것은 통틀어 도리를 말한 것이다."


주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성 작용을 양과 연결하고, 그 작용이 개체의 본성을 완성하여, 그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상태를 음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주희는 이러한 음양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도리를 순수하게 선하다고 평가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선하다는 것이 음양의 질서가 교차하면서 만물을 화육하는 조화와 관련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선하다는 것은 "만물이 함께 자라도 서로 해치지 않으며 무언가를 동시에 해도 서로 어그러뜨리지 않는" 조화로운 상태를 지시하며, 나아가 이러한 조화가 끊이지 않고 활발하게 유지되는 상태에 대한 형용입니다.


또 주희는 중용집주에서 “사물과 마주할 때마다 조금의 어긋남도 없어서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음에 이르면, 그 조화와 만물의 자라남이 지극해진다”고 말하면서, 본연의 선이 충만해질 때 어떠한 효과가 나타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때 주희는 선이 개체 간의 관계 안에서 성취되는 적절성과 관련된다고 보고 있지요. 즉 선의 충만함은 관계 내에서 개체들이 조화를 이루고 또 유지하는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희가 주목하고 있는 선은 관계 내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그 적절성은 조화와 그 조화의 유지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된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희는 이러한 조화와 그 유지가 단순히 상황에 따른 임시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본성을 미루어 타자의 본성을 완성하는 경지에 이러서야 성취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희는 ‘나’를 포함하여 천지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연결은 단순히 물리적인 연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공명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이라는 것에 주목해야합니다. 주희는 이러한 공명 가능성에 기대어 ‘나’의 마음과 ‘나’의 기운이 바르고 순하면, 천지의 마음과 기운 또한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되리라는 이상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명 가능성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나’의 내면에 본성으로서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명 가능성은 性의 고유한 성격이며, 따라서 리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선은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미루어 나가 타자의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성취됩니다. 이에 대해서 주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스스로 그 명덕(明德)을 밝혔으면, 또 마땅히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쳐서, 그로 하여금 또한 옛날에 물든 더러움을 제거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지(止)는 반드시 이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 뜻이요, 지선(至善)은 사리(事理)의 당연(當然)한 극(極)이다.” 주희에게 있어서 선은 인간의 본성으로의 회복을 통해 성취되며, 타자와의 공명을 통해 타자들을 조화 안에 참여시킴으로써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 개체 내의 본성은 다른 개체의 본성과 공명하며, 따라서 ‘나’의 완성이 타자의 완성으로 확장될 때 온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주희가 본성을 두고 선하다고 한 것은, 어떤 사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기에 앞서 본성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들에 대한 서술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은 첫째, 본성이 하늘로부터 명받은 바대로 온전히 있음을 나타낸다. 둘째, 본성이 음양이 끊임없는 번갈아가며 운동하면서, 활발하게 만물을 생성해내도록 하는 기능을 가짐을 표현한다. 셋째, 본성이 다른 것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 타자와 공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형용한다.


참고문헌: 이찬, 2010, 性善說의 메타-윤리학적 구조 ― 성리학의 도덕적 자연주의 해석을 위한 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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