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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Apr 06.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12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까지 알려진 지식들과 자신의 직관적 능력을 통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일련의 설명을 제공합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이 특히 흥미로운 점은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설명들은 사실상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이 제시한 문제들과 답변들에 대한 도전입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변과 변화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이래의 논쟁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델은 무에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고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대답에 대한 반박과 보완의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지요. 즉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론이 가지는 내재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겁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보자면, 플라톤이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원론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비교적 유기적인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나중에 살펴볼테지만, 그들의 실천철학에도 지대한 차이를 만듭니다. 플라톤은 피안의 세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세계를 극복할 대상으로 보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제가 볼 때, 두 모델 중에 무엇이 더 그럴싸한지 결정적으로 판단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개인의 신앙의 영역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두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네요!


예를 들어, 내가 특정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기독교 신앙은 (여느 기독교 신앙과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기반과 목표는 어디까지나 신에 대한 열렬한 헌신이라고 해봅시다. 이런 신앙에 비추어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신과 신의 피조물 사이에는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있기 때문에, 하나는 무한하게 가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어쩌면 비유적으로) 무한하게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신을 향한 여정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로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지위를 지닙니다. 지상의 것들에 대한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의도로 무장하고 있을지라도, 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허무한 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대략 이런 가르침에 기반하고 있는 신심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가 이런 신심을 가질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은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를 사소하고 불결한 것으로 사고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계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쉽게 양립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순수한 애정을 흠결로 규정하고 극복하기를 종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봅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 기독교 신앙 때문에 실존적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해봅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고 있는 유기적 세계관은 세계와 신 사이에 심연을 반드시 전제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전제는 논리적이지 않다는 제안을 해옵니다. 이러한 대안의 존재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압도되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자기혐오에 빠진 사고방식에 대한 재고의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땐, 반성의 계기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유로움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철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심지어 이러한 대안의 존재는 단순히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성은 앞선 철학자들과의 연관성도 가지지만 후대 철학자들과의 연관성도 가집니다. 그의 설명 중에 애매모호한 부분들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은폐되어 있던 모순들은 명백해지며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이 기여 한 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관이 구축되고 유통됩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도 세계를 이해하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들의 집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게 될지도 모를 수많은 “답도 없는 질문”들에 대한 가능한 답들을 제시해줌으로써 의문과 호기심으로 바싹 마른 지적인 목마름에 조금의 안식을 줍니다. (물론 이러한 순간의 안식이 더 큰 목마름을 가져오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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