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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유민 Sep 14. 2024

네가 부러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오빠를 보고 엄마한테 말한다.

 "나도 오빠처럼 피아노 배울래요!"


 티비에 나온 사람들을 보며 혼잣말이 나온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얼마나 좋을까?"


 친구가 고른 메뉴를 똑같이 시킨다.

 "나는 원래 비빔밥 먹으려고 했는데 너 보니까 냉면이 더 먹고 싶네."


 따라쟁이 병에 걸렸다. 다른 사람을 똑같이 따라 하는 병.


 어릴 때는 오빠가 하는 모든 것이 부러웠다. 오빠가 갖고 있다면 나도 가져야 했고, 오빠가 먹는 모든 것을 내가 먹어야 했다. 오빠 옷이 제일 좋아 보이고, 오빠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밌어 보였다. 지금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오빠 옷장에 걸린 내 것과 똑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티셔츠를 보고 잠깐 멈춰 서기도 한다. 식당에 가면 내가 고른 메뉴보다 왠지 오빠 것이 더 맛있어 보여 한 입만 달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오빠는 뿌듯한 얼굴을 하고 내게 말한다.


 "봐, 내가 고른 게 제일 맛있다니까!"


 이십 년째 듣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아니야!"라고 외치며 내 음식을 더 맛있게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오빠 앞에 놓인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흐뭇하게 먹는 오빠가 괜히 얄밉다.


 그렇게 이십 년을 보내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오빠가 고른 음식이 내 것보다 맛있다. 거의 항상 그랬다. 그래서 이제는 주문을 하기 전에 오빠한테 무엇을 먹을 건지 물어본다. 그리고 나도 오빠랑 똑같은 것을 시킨다. 음식이 나오면 '역시 이게 제일 맛있어'하며 이십 년 인생 동안 내린 결론에 더욱 확신을 갖는다.


 어릴 때는 나만 따라쟁이인 줄 알았다. 따라쟁이의 삶도 나쁘지 않았지만 오빠가 무엇을 하나 항상 주의 깊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스무 살이 되고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사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인류애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물한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주도적으로 관계를 맺기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다 보니 이제는 꽤나 깊은 통찰력이 생겼다. 인류애가 없는데 인간의 감정을 주의 깊게 보며 잘 파악하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쩌면 이것이 나에게는 인류애일 수도 있겠다.


 나름대로 키워 온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니 인간의 눈빛에서 많은 감정이 보인다. 나만 따라쟁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나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부러움'의 눈망울을 장착하고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프라인에서 '부러움'의 눈빛을 애써 감추어도 SNS에 그렇게 티를 내게 된다. 다른 사람이 올린 보정이 가득한 화려한 사진을 보며 '부러움'의 레이저를 강하게 쏘고 있다.


 어떤 것을 부러워하는 감정은 사실 긍정적인 원동력이다.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연설가의 강의를 듣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하며 그 감정에 맞춘 좋은 습관을 쌓아간다. 나는 집에 울려 퍼지는 오빠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더 열심히 연습해서 '방구석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침대에 누워 내내 유튜브를 떠돌다가 '서울대생의 브이로그'를 보고 벌떡 일어나 의자에 앉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부러움'은 삶의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그 반대라고 볼 수 있겠다. 부러워서 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 본능에 따라 부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남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부러움의 '정도'다. 무엇이든 정도가 지나치면 병에 드는 법이다.


'부러움' 역시 상한선을 넘으면 '샘', 더 지나치면 '질투'라는 단어로 변한다. 이미 그 선을 넘은 사람의 눈빛은 회색빛이 도는 붉은 연기를 내뿜는다. 그 연기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빨아들인 것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는다. 얼마 안 있어 그것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먼지가 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좋고 예쁜 것들이라도 내가 보기만 하면 텁텁한 먼지가 된다고 생각해 보아라. 만약 그것이 사람이라면? 그 소중하고 멋진 사람을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질투'란 그런 감정이다. 과하게 탐내어서 나에게 거름이 되기는커녕, 아무런 실체가 없는, 오히려 무시무시한 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질투'가 '부러움'의 끝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망상'이 기다리고 있다. '저 사람이 부럽다'는 '내가 더 잘나야 하는데 저 사람이 더 행복한 것 같아 짜증 난다'가 되고 '저런 사람은 분명 더러운 구석이 있다'라는 '망상'의 수준까지 간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남을 부정적으로 보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질투'의 눈빛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지하철에 앉아 평화롭게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부러움'과 함께 어쩐지 부정적인 눈빛이 보여 내 마음의 평화에 슬픈 금이 간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인간이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누군가가 내쉬었을 씁쓸한 질투의 연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현실이 가여우면서도 밉다.


 인간과 '부러움'은 뗄 수 없는 사이다. 본능적으로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마음, 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오빠가 먹는 음식과 똑같은 것을 시킨 나는 더 맛있는 걸 먹었다는 생각에 행복을 느꼈다. 지금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거나, 내 친구가 나를 따라 하거나, 내 아이가 오빠 언니를 너무 부러워하고 자꾸 따라 한다면, 짜증 내고 꾸짖기보다 응원을 하자.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그들을 축하하며, 한 가지만 조심하며 살아가자. '네가 부러워'가 건강한 것이지, '네가 질투나'까지는 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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