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사 초년생입니다
스슷!
헉!
일격을 당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충격이 컸다.
이게 이럴 일인가?!
내 비록 무림지존에 비하면 그 발치에도 못 닿는 수준이었겠지만 그래도 많은 고수들 밑에서 사사받으며 내공을 쌓은 시간이 20년, 쉽게 쓰러질 저질도 아니다. 다만 더는 하루하루 허덕이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회사생활에 내 몸과 마음을 갈아 넣고 싶지 않다는 다짐으로 무림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재야에 나왔는데, 무림과 재야를 틈틈이 오가며 경험을 더 쌓은 통키가 마침 좋은 자리를 주선해줬다.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무림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나의 수고로움은 한결 덜한 업무여서 쾌재를 불렀다.
‘이제부터 운동도 하고 내 시간도 더 가지면서 나를 챙겨야지. 무림은 떠났지만 재야의 고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음하하!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러나 그런 섣부른 생각은 빠르게 현타로 이어졌다. 면접이라는 표현은 그냥 형식적인 것일 뿐 첫인사차 한번 나오라는 말에 찾아간 사무실은 무거운 공기로 사람을 짓누르는 곳이었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바닥에서부터 소리가 올라오며 발걸음을 신경 쓰게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처음 나를 맞아준 플라워는 총무팀에서 근로계약서를 담당하는 분으로 꽃같이 부드러운 말투로 나를 안심시켰다. 접견실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게 해 주니, ‘아 진짜 드디어 나에게 꽃길이 열리나’ 기대감이 높아지려는 찰나, 다 부질없는 착각이었다.
곧이어 만나게 된 백발의 신령은 내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으로 딱 봐도 빈틈없는 꼰대였다. 형식일 뿐이라던 면접은 압박 면접이 됐다.
“잘 다니던 회사 왜 그만두고 나왔어요?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일할 건가요?”
‘나 이미 다니기로 정해진 거 아니었어? 나 잘하니까 그냥 쓰면 된다며? 나 싫은 거야?’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준비되지 않았던 답변을 가벼운 마음으로 툭 내뱉고 말았다.
“좋은 기회를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한다니 놀러 온다는 거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플라워와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 상에서는 이상할 게 없었겠지만 신령에게는 아니었다. 신령으로부터 돌아오는 말에는 칼날이 서 있었다.
“진심을 다 해서 일하길 바래요.”
‘그래, 내가 잘못 말했지. 그런데 진심은 또 뭐지. 하아, 내가 너무 쉽게 봤네. 잘못했네.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한데.’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아쉬움이 밀려오는 첫 만남이 됐다.
그리고 업무를 시작하는 날, 그때서야 그 사무실에 남다른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소심한 나는 쉬운 일이라도 실수라도 할까 싶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어깨를 높지도 않은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이상한 무게감이 짓눌러 예전 회사라면 콧방귀 뀌며 했을 일을 우왕좌왕하며 하게 됐다.
그래도 못할 일은 아니어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 하는데 신령이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화면 속에 내가 보낸 파일이 큼지막하게 펼쳐져 있었다. 내가 실수한 부분이 딱 보였다.
‘나 원래 이런 실수할 사람이 아닌데, 나 원래 일 좀 한다 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사수들한테 총애받은 몸인데. 이게 무슨 영문이지?’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신령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랫배에 품고 있는 공력이 금방이라도 장풍을 쏠 것만 같았다. 그렇다. 신령이야말로 재야의 고수였다. 정년퇴임을 하고도 실력을 인정받아 재야에서도 그렇게 쓸모 있게 쓰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신령 말고도 재야의 고수들이 여럿 있어서 사무실의 이상하게 묵직한 공기는 그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묵직한 공기를 두 어깨로 가뿐하게 받치고 있었다. 사무실 바닥은 그들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데, 단련된 몸놀림으로 사뿐사뿐 바닥을 소리 없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실수는 없어야 하는데요. 앞으로는 집중해서 해주길 바래요.”
돋보기 너머를 바라보느라 인상을 쓰게 되는 신령이 틀린 말 하나 없는 이야기를 노련한 말투로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반박할 말도 없고 애티튜드도 뭐라 흠잡을 수가 없다.
그 비슷한 일들이 그 다음날, 그 다다음날, 그리고 그 다다다음날에도 반복됐다. 나는 실수를 했고 신령은 나를 불러 세웠다. 이 업무가 지난날 했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손쉬운 것인지 짚어주는 신령의 지적에 나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신령이 꼰대처럼 말했지만 나 역시 사회생활 오래 한 꼰대라 띠동갑쯤 터울 지는 꼰대를 꼰대로 존중해줄 마음이 충분히 있었다.
애석한 점이라면 실수를 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큰 실수를 해댔다는 것이다. 내 원 참. 그래서 매번 신령이 쏜 듯 안 쏜듯한 장풍들을 맞고 퇴근하는 길이면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기운이 풀려 팔다리가 후들후들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수저를 든 손목이 덜덜덜 떨렸다.
결국 며칠만에 화가 불끈 솟았다. ‘이게 이럴 일이야?!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나도 내일모레면 50인데 말이야! 거, 좀, 실수를 해도 적당히 알아서 손봐주라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거 아니야?! 나 이렇게 다녀야 하는 거야? 어차피 계약기간도 길지 않은거, 딱 그만큼만 하고 나가버리면 그만! 이딴거 못해먹겠다!'
그렇게 파르르 하면서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고나니 스르륵 화난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반백세를 앞두고 있으면 뭐하랴. 나는 재야의 초년생. 내공은 무슨,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