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우애? 자비도 바라지마

-나는 퇴사 초년생입니다

by 문성옥

나는 퇴사 초년생입니다

까똑, 까똑, 까까똑, 까똑!
빨리 안될까요?
이거 요청이요. 저거 수정이요.
죄송해요! 감사해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무림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매일매일 누가누가 잘났나 겨루며 대결을 펼치는, 살벌한 무림은 처음부터 나랑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운 좋게 죽지 않고 살아남아 20년을 버틴 것이었는데, 20년을 채우고 보니 스스로 그만 하산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겁한 변명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20년씩이나 자기최면 걸고 노력했으면 이제는 좀 봐줘도 되지 않나.


그렇게 당당하게 무림에서 도망쳐 나온 나는 더는 하루하루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재야에 당도했다. 재야에서는 내 방식대로의 삶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 내게 통키는 내가 할만한 일을 주선해주면서 이 사무실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했다. 무림에서 나온 사람들. 게다가 내가 한창 무림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 알고 지내던 일성, 다은, 모모 등도 있다고. 마음 의지할 사람들도 있구나 싶어 안심하고 통키가 소개한 사무실에 출근하기로 했다.


왜 그랬을까. 왜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정글 같은 직장이 싫어 뛰쳐나가면 직장 밖 그곳은 지옥이라고 하지 않나. 이 사무실은 지옥까지는 아니어도 똑같은 직장이거늘 정글이 아닐 거라 기대한 나는 바보였다.


재야의 이 사무실은 무림에서 물러난 자, 무림에서 밀려난 자, 무림에서 쫓겨난 자, 무림을 등진 자 등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이유로 무림에서 나온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모두가 내공의 소유자로 여차하면 한판 대결이 펼쳐질 태세였다. 무공을 수련한 문파가 각각 다르다 보니 협업을 한답시고 모여놓고 서로 다른 법도를 들이대며 기싸움을 펼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이제 막 투입돼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들의 화를 돋우는 문제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실수의 연속이어서 매일 신령에게 장풍급 꾸중을 듣는 것도 모자라 팀원들에게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면서 그로 인해 단톡방에 불이 나곤 했다. 안 그래도 실수가 생길까 아슬아슬한데 메신저가 끊임없이 들어오니 매번 확인하고 업무를 처리하느라 집중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실수가 줄어들 수가 없었다.


“빨리 안될까요?”

“확인 좀 해주세요. 수정 좀 해주세요.”

“자꾸 너님 때문에 부하가 걸리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요.”


속이 상하지만 능숙하지 않은 내 탓이니 뭐라 하랴. 내 대답의 절반은 “죄송합니다”가 됐다.


물론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많은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이겠지만, 오전에는 내내 별일이 없다가 오후 늦게 되어서야 퇴근 전에 끝내야 하는 과업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놓고 왜 나만 닦달인가.


그러던 어느 금요일에도 이변 없이 느지막하게 과업이 시작됐다. 별수 없이 허둥댔지만 결국에는 웬만한 시간에 일을 끝냈다. 신령이 “고생했다” 한마디 던져주고 먼저 사무실을 떠났다. ‘아 다행이다.’


간만에 기분 좋게 퇴근을 하면서 지하철역에 들어서기 전 로또를 한 장 샀다. 벌써 한주간 쌓인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역시 주말은 좋은 것! 오늘은 불금을 즐겨야지!’


그러나 방심은 역시 금물. 지하철에 몸을 싣는 순간 단톡방에 불이 났다. “까똑, 까똑, 까까똑, 까똑!” 중간에 자료가 추가됐단다. 수정도 생겼단다. ‘망했다!’


손가락으로는 일단 “죄송합니다”를 자동완성하면서 머리로는 해결책을 생각해야 했다. 동시에 ‘뒤늦게 자료 줘놓고 왜 내가 먼저 퇴근해서 죄송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빡침이 몰려왔다.


그때 모모가 나서서 자신이 일을 처리해주겠노라 단톡방에 선언했다. 모모는 늘 저밖에 모르는 맹랑한 말투지만 업무 처리가 빨라 서로 냉랭한 팀원들도 그에게는 껌뻑 넘어가는 분위기다. 그가 손들고 나서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단톡방에 즐거운 활력이 감돌았다. 그리고 불과 10여 분만에 상황을 종료시켰다. 사람들은 모모에게 기쁨과 감사의 이모티콘을 쏘아댔다.


나 역시 모모에게 감사를 전했다. 단톡방에 이어 개인톡에도 큰절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알랑방귀를 뀌어댔다. 심란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해야 했던 수고를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자 모모가 내 개인톡에 답했다.


“간혹 이런 날이 생겨요. 늘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뭐지, 츤데레?!’ 앞서 일하면서 모모에게 몇 차례나 마상을 입었던 터라 날카롭게 할퀴는 말을 하더라도 굽신 받아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말에서 감동의 마음이 물결쳤다. 정신없이 그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며 온갖 축복의 메시지를 더했다. 그러자 몇 분간 읽씹이던 그는 내 감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두 줄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싫은 소리 듣기 싫으면 잘하는 수밖에요. 단톡방에 불나면 내 일 아니어도 짜증나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잠시 모모와 전우애가 생겼다고 감상에 젖을 뻔했는데, 그가 선을 확실히 그어줬다. 모모의 마지막 말이 쐐기가 돼 피곤했던 마음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래, 인생은 각자도생인데 내가 무얼 바랬던건가.’


무림에서 20년이 허송세월이었는지 유독 자존감이 떨어지며 그날밤 쉬이 잠들지 못했다. 한참이나 분루를 떨군 끝에 이불속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오늘밤 내 마음에도 자비란 없다!’ 총질이 난무하며 유혈이 낭자한 원색적인 OTT 한 시즌을 끝낸 새벽녘이 되어서야 마음이 진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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