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自仁 雜說 (1)
‘면접’
고등학교 때 지리선생님이 대척점(對蹠點)에 대해 설명하신 적이 있다. 지구의어느 한 지점에서 지구의 중심 핵을 통과하고 계속 구멍을 파면 다시 밖으로 나오는 데 그 곳이 대척점이다. 대척점은 시차가 12시간 나니 밤과 낮이 서로 반대이고 또한 계절도 서로 반대이다. 북반구 서울의 대척점은 남반구 브라질 바로 밑 우루구와이 이다. 우루구와이는 브라질 영토였다가 독립한 브라질 남쪽의 작은 나라이다. 나는 서울의 대척점 근처인 브라질 남부에 살고 있다.
서울은 여름 장마비가 온다는 한 밤중이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려 왠지 센치멘탈해지는 오후 시간에 사무실 창문가에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마침 내일은 휴일이고 공장은 이번 주 내내 단체 휴가에 들어가 생산 라인이 멈추었으니 시간이 생겨 한가한 오후이다. 편린(片鱗)으로 흩어져 있는 단상을 주섬주섬 모아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내 문재(文才)가 부족하여 졸문(拙文)이지만, 글을 써보고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대학 때 고시 공부한다고 이불과 책을 싸 들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 해발 800 고지에 위치한 다 쓰러져가는 조용한 절에 들어 갔었다. 스님이라곤 주지 한 명이어서 주지가 탁발하러 하산한 중에 공양주가 오면 할 수 없이 내가 목탁 치며 엉터리 중 노릇 하는 등 어영부영 하다 보니 이룬 것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끌려 갔다. 제대하는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취직하기로 맘 먹고, 말년 휴가 나와서 여의도에 있는 소위 요즘 말하는 ‘신도 부러워하는 직장’ 또는 ‘신이 숨겨 놓은 회사’에 취직 원서를 제출했다.
그 회사는 규모는 작지만 월급은 매우 높고 영업이 필요 없이 증권거래에 관한 전산 시스템만 잘 돌아 가면 수입이 생기는 회사였다. 편의상 ‘H사’라 부르자. 2명을 선발한다는데 일단 서류 전형에 합격하여 면접 받으러 나갔다. 면접 대기실에서 보니 나와 내 대학 동기 K등 총 6명이 지원해서 긴장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K에 따르면 그 H사의 사장은 1979년 12.12 사태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 측의 군사 쿠테타에 맞서던 당시 수도 방위를 책임 지던 강직한 사령관 출신 J 장군이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 후, 자신에게 맞섯던 적이었지만 신망받는 군 선배임을 감안해 증권거래소 전산실을 쪼개서 회사로 만들고 J 장군을 사장으로 보임했다고 들었다. J 장군은 문민 정부에 와서 12.12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지금은 타계한 것으로 안다.
6명 중 내가 6번이라서 지루하게 기다렸다. 한 명씩 들어가서 J 장군과 1 대 1 면접을 하는 데 한 명당 30분씩이었다. 난 내내 군복만 입다가 양복입고 넥타이 매고 앉아 있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2시간 넘게 기다리니 드디어 내 앞 번호 K가 면접받으러 들어 갔고 그 다음이 내 차례이니 긴장을 풀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면접 인솔자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대충 추스리고 나가니 인솔자가 대뜸 화부터 낸다. 꼼짝 말고 대기하라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들어 갔다. J장군이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이 6번!”
“넷! 6번 병장 진의환 입니다” 큰 소리로 대답하고 거수 경례까지 하려다가, 군복을 안 입고 양복을 입은 걸 알고 엉거주춤 손을 내리고 허리를 숙여 90도 인사하였다. 그러자 장 사장이 말했다.
“어이, 자네 거 지퍼 좀 올려. 남대문 열렸잖아.”
아뿔싸! 아까 화장실에서 급히 나오는 바람에 바지 지퍼를 잊었고, 허리 인사를 하니 쩍 벌어지는 민망한 광경을 보여 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하고 돌아 서서 지퍼를 올리고 나니, “어디 근무하느냐”라고 한 마디 물어 보더니, “그만 나가 봐” 라고 말하면서 나에게는 더 이상 질문을 안 하는 것이었다. 다른 지원자에게는 30분씩 면접을 했었는데…
떨어졌다 생각하고 친구들 만나 술 거나하게 마시고 집에 들어가니, 형수가 “오늘 면접 합격했으니 내일 H사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다음 날 H사에 나가 보니 웬 일로 어제 면접 본 지원자 6명이 다 다시 나온 것이었다. 분명 두 명만 선발한다 했는데…
잠시 후 인사부장과 J 장군이 들어 왔다.
인사부장 왈, “어제 사장님께서 면접을 했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어서 오늘은 집단 토론 면접을 하겠습니다”라며 칠판에 ‘한국 증권 산업의 미래와 전략’ 이라고 쓰고, 이 주제에 대해 각자 20분씩 발표하라고 했다. 당황했다. 난 증권에 대해 아는 것도 공부한 적도 없어서.
그 때 학생회장 출신인 대학 동기 K가 탁자를 손으로 꽝 치다니 벌떡 일어나서 “에이 씨발! 이런 회사가 다 있어? 합격했다고 오라 해놓고 다시 면접해? 나 더러워서 이런 회사 안 다녀!” 하더니 나가 버렸다. 순간 나도 따라 나갈까 생각하다가 다시 앉았다. 어차피 나가 봤자 할 일도 없고, 맨 마지막이니 다른 사람 애기하는 것 듣고 공부나 할 요량으로.
4명이 20분씩 발표를 했다. S대 등 우수한 대학 학, 석사 출신이니 다들 유식했고 말도 청산유수였다.
내 차례가 되어 일어나서 한마디 조용히 하고 나왔다.
“저는 증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말씀 잘 들었고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귀대했고 그로부터 몇 일 후 형수로부터 흥분에 찬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삼촌, H사에서 이번에는 진짜로 합격했으니 제대 다음 날부터 곧 바로 출근하라고 연락 받았어요!”
어떻게 합격했는지 의아해하며 보름 후 제대하고 그 다음 날 출근했다. J 장군으로 부터 ‘진 의환, 감사실 근무를 명함’이라고 적힌 사령장을 군대식으로 직접 받고 근무를 시작했다. 아침 9시 반에 통근차 타고 출근, 10시 반까지 신문보고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다가 11시 반이면 점심 먹으러 나가서 오후에는 조금 일하다가 5시면 칼 퇴근….
보름 쯤 일해보니 너무 편하고 일에 비해 월급은 너무 많아서 무언가 불공평 하다고 생각되어 다른 회사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사회 초년생인 젊은 놈에게 배울 것도 도전할 것도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다른 회사로 간다 하니까 인사부장이 당신 입사 동기는 잘 다니고 있는데 왜 나가냐고 물었다.
누가 내 동기냐고 물어보니 기획실의 K가 있으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 날 K와 나는 소주 한잔 하면서 한 참 유쾌하게 떠들었다.
“아이고! J장군님은 참 별난 분이셔. 아니, 그 말 잘하고 똑똑한 증권 박사들 다 떨어뜨리고, ‘에이 씨발’ 하고 욕하고 나간 너하고, 면접에 남대문 열고 들어왔고, 집단 토론 시에는 말 한마디 못한 나를 뽑다니… 하하하!!!”
이제 우리 친구들의 자녀가 취직하려고 면접 준비하는 때이다. 이미 취직한 자녀를 둔 동기들은 안심하고 축하 받아야겠지만, 취직 준비생을 둔 부모는 애간장이 타 들어 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미국, 인도, 브라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면접하고 선발했다. 지금까지 내가 선발한 직원 중 약 50% 정도 만이 잘 뽑았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50%는 그저 그렇거나(보통) 잘못 뽑았다는 것이다. 내가 신이 아닐진 데 어떻게 단 몇 십 분의 면접으로 조직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성실성을 다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모 대그룹의 창업 회장은 관상쟁이를 옆에 두고 면접했다는 소문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면접관이 되어보니 왜 J 장군 사장이 나와 K를 선발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실성, 위장하지 않는 솔직함이 J장군이 사람을 뽑는 기준이었고 나도 현재 100% 동감하여 사람 보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실력은 일정 기준만 맞추면 된다. 내 딸이 취직 면접할 때에도 누누이 이 점을 강조하였다.
사실 면접관은 처음 2~3분이면 일단 결정을 한다. 선택할지 떨어뜨릴지를. 어떤 한 지원자에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은 면접관이 그 사람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확신이 안 생겨서 추가 질문을 하는 것인데, 피면접자는 자기를 뽑을려고 질문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한국에서는 지원자 5명 정도가 같이 들어가 면접 보는 집단 면접이 주종이다. 타 후보보다 더 많은 질문을 받을 때에는 그만큼 조심하고 진실하게 답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과장되거나 허세를 떨면 바로 탈락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몇 년 전 한국에서 한 조에 5명씩 하는 면접에 면접관이 되어 들어 간 적이 있다. 지원자 5명 중 한 명에게만 최고 점수를 줘야 하는데, 3명은 탈락이라 결정하였고 2명 중 누구를 선택할 지 면접이 다 끝나 갈 때까지 확신이 안 서서 고민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냐고 하니까 2명 중 한 명이 갑자기 일어나 “저는 영업 쪽을 지원합니다 영업을 하려면 얼굴이 두꺼워야 하는 데 제가 얼굴 두껍다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하더니 양복 윗도리를 벗고 유행가를 개사한 노래를 군가처럼 반동을 넣어가며 부르기 시작했다.
“S사가 부른다면 망설이겠지만, K사가 부른다면 ~~~ 태평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 무조건 달려갈 거야~~~”
난 바로 결정했다. 노래 부른 놈, 탈락…
2015.7.8
自仁雜說 (2)
‘생일’
몇 일전 7월 1*일에 밴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상하지도 않게도 내 생일이라고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떴고 그 아래 많은 친구들의 축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밴드 가입하고 처음 맞는 생일이라 이렇게 많은 축하 인사를 받으니 쑥스럽기도 했고, 이거 생일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하자니 설명이 길어 지겠고…. 난감했다. 이왕 받은 축하이니 올해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내 생일은 경자생(庚子生) 쥐띠이니 정확하게는 1960년 9월 *일 오후 6시경이다. 그 날이 음력 7월 1* 일이다. 그러나 내 호적상 즉, 법적인 생일은 1961년 7월 1* 일로 기록되어 있다. 해외 근무하는 동안 현지인들이 제일 헷갈려 하는 것이 내 생일과 내 나이이다.
현지인들이 회사 공식 기록을 보고 7월 1* 일에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 오면 난 그들 앞에서 음력과 양력의 차이 및 왜 나의 실제 나이와 법적 나이가 다른 지에 대해 설명해 줘야 했다. 내 설명은 조국의 광복과 한국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슬픈 이야기가 된다.
내 선친은 장손이었다. 처음에는 장손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촌 형이 장손이었으나 그 분은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둘 낳고 요절하셨다. 장자인 할아버지는 대를 끊기는 대죄를 조상께 짓지 않고 제사 봉양이 대대손손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카인 선친을 장자로 입양하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을 갖고 시집살이를 시작하신 것이다. 첫 번째는 딸이었다. 내 큰 누나. 어릴 적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나의 모든 투정을 받아 주셨다. 아들 못 낳은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견디셔야 했다.
두 번째는 다행히 아들, 내 큰 형님. 그 때가 광복 직후였으니 행정 미비로 제 때 출생 신고가 안되고 1년 늦게 출생 신고가 되었다. 둘째 형은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나니 출생 신고 자동 지연.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종가 집 며느리답게 나를 포함 6남 2녀를 낳으셨으니 가난한 시절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는 짐작이 간다. 큰 형님부터 출생 신고가 1년씩 늦어졌으니 도미노 효과로 나의 출생 신고까지도 1년씩 줄줄이 늦어져서 난 호적상 1961년생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참으로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 생물학적 나이보다도 법적 나이가 한 살 적으니 난 1년을 덤으로 더 살은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요즘 연말에 정년 퇴직을 해야 하는 직장인 중에 11월이나 12월의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고쳐 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내서 그 결정문을 가지고 주민등록번호의 앞부분 6자리를 바꾼 다음, 그 문서를 회사에 제출하여 정년을 몇 달 또는 1년까지도 연장하는 사례가 있다고 들었다.
참 알뜰한 삶이다. 그런 경우에 비하면 난 처음부터 1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얼마나 행운인지! 아버지가 한 2~3년 더 늦게 내 출생 신고를 하셨으면 더욱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난 8남매 중 7번째이다. 어머니는 이미 다산으로 온 몸의 진이 다 빠지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길고 긴 가뭄의 뜨거운 여름을 충분치 못한 영양으로 간신히 버티신 후의 산고였을 것이다.
햇곡이 나오기 직전인데다 전체적인 영양 부실로 결국 모유가 안 나오니, 나는 쌀가루와 보릿가루를 갈아 만든 암죽을 먹는 영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기운 없이 시름시름 죽어갔고 그를 지켜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는지는 상상이 간다. 어머니는 실성 직전이었고 마지막 수단으로 나를 볏짚 위에 뉘여 놓고 천지 신명께 간절하게 매달려서 살려냈다고 한다.
큰 누나는 내 생일이면 으레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셨고, 그러면 우린 펑펑 눈물을 흘리곤 했다. 50대 중반에 있지만, 그 상황은 생각만 해도 언제나 조건 반사적으로 나의 눈물 샘을 하염없이 터트린다. 사무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도 자동적으로 눈물이 주르르 흐르니 결재 받으러 직원이 갑자기 들어 올까 봐 얼른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친다.
우리 동기친구들의 어머니가 다 그러셨겠지만 우리 어머니도 가부장의 권위에 절대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내가 어릴 적 우린 10식구가 북적거리며 한 지붕 밑에 살았다.
그 시절 햅쌀이 나오기 전에는 보리를 삶아 대나무 조롱에 넣어 부엌 천정 서까래에 연결된 끈에 동실동실 매달아 놓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더운 날씨에 쉬지 말라고.
우리 식구들은 그 보리밥을 먹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진지만큼은 항상 보리 한 톨 없는 흰 쌀 밥으로 따로 지어 드렸다.
어느 늦여름 날, 어머니는 광에 있는 큰 쌀독을 바닥까지 닥닥 긁어 쌀을 퍼내시니 두 세 말 정도가 나왔다.
어머니는 그 쌀로 햅쌀을 추수할 때까지 버텨야 했으므로, 그 쌀을 바라 보시며 슬픈 표정에 한 숨을 내쉬고 계셨다.
그 쌀로 모든 식구에게 쌀 밥도 해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쌀의 반 이상을 아버지를 위해 막걸리 제조용 고두밥 만드는 시루에 넣으셨다.
어릴 적 여름 날 아침, 입이 짧은 나는 보리 밥이 먹기 싫어 젓가락으로 끌쩍거리며 밥상에서 기다린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맘을 다 읽을시고 잡수시던 놋쇠 그릇의 쌀 밥을 반쯤 남기시고 수저를 놓고 나가신다.
그러면 얼른 난 그 밥을 가져다 놓고 먹기 시작한다. 어머니, 누나, 형제들 다 제치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내 밥 색깔만 아버지 진지와 똑 같은 날이 있다. 형제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 날은 어김없는 내 생일이었다. 난 음력을 따질 줄 몰랐으니 내 생일은 흰 쌀밥을 보고 알았다.
이런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에 점철된 나의 생일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한 살 한 살 야금야금 나이가 내 몸 갉아 먹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다. 그래서 생일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되도록 조용히 지낸다.
케잌 자르고 미역국 먹는 지금의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 줄 수 없음이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나를 낳고 온갖 신고에 지치셨던 어머니, 날 살리려고 신령님 전 빌고 빌던 어머니, 그리고 이제는 눈물 밖에 바칠 것이 없는 어머니!
유행가 사모곡의 그 가사가 귀에 맴돌며 콧등이 다시 시큰해진다.
2015.7.
自仁雜說 (3)
‘됐~유~’
1984년 2월 13일 아침 8시경. 아직도 엄연한 겨울의 한기에 온 몸을 으스스 떨며 공주 차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공중 전화 박스에서 고등 동창 O에게 전화했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O는 전화 받자 마자 차부 근처의 음식점으로 총알같이 튀어 나왔다. 고마웠다.
소주 한 병에 따끈한 해장국 한 사발씩 먹었다. 아침 해장 후 바로 우리는 연무대 행 버스에 올랐다.
연무대 수용연대 앞은 시장 바닥 같았다. 울고, 껴안고, 노래 부르고….
그 바글바글한 와중에 볼펜, 바늘과 실, 노랑 고무줄 파는 아줌마들은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그것들을 안 사서 입대하면 큰 일 날 듯이 말했다. O와 나는 조용히 이별의 포옹을 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수용연대에 정문 안으로 힘 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부터 내 호칭은 ‘충남 장정(壯丁)’ 이었다.
새로 지급된 헐렁한 군복 입고 3일 동안 나는 ‘충남 장정’들 속에 묻혀 있다가 논산 훈련소 26연대에 편제되었다.
수용연대에서 훈련소 내무반까지 쭉 같이 온 몇 명의 충남 장정이 있었다.
훈련소 우리 내무반은 경상도 전라도 서울 등 각도의 훈련병으로 혼합 구성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장정’이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훈련 기간 중 어느 일요일 오후 내무반에서 각자 쉬고 있을 때 기간병이 들이닥쳐 소리친다.
“야! 작업할 게 있으니 각 내무반에서 10명씩 연병장 집합해라.”
그러자 경상도 문둥이들은 “아이고 똥 마려” 하고 관물대에서 화장지 꺼내서 화장실로 가고, 전라도 따블 백들은 빨랫감 들고 세면장 가고, 서울 뺀질이들은 PX로 도망간다. 결국 연병장에 나가 보면 수용연대에서 만난 ‘충남 장정’들만 나와 있는 걸 보았다.
그래서 군대에서 ‘멍청도’란 말이 생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어디 가든 부지런하게 솔선수범하기 때문이다.
충청도 특히 충남인은 절대 약싹 빠르지 않다. 어떤 땐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어지간해서는 속 내를 잘 드러내지도 않는다.
얼굴 표정과 동작 그리고 말에서도 호(好), 불호(不好)를 철저히 은폐시킨다.
충청도 말은 느리고 어눌한 것 같지만 그대신 짤막하게 요점만 정확히 표현한다.
요즘 장마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다들 삼복 더위에 지쳐 있다.
충청도 영양탕 집에서 어제는 복날이라 맛 있게 먹었는데 오늘도 그것이 있는지 알고 싶은 경우의 대화는 이렇다.
“개 혀~?”
“해~유”
또 다른 예를 들면, 밤에 잠자다가 부인이 부스럭거리자 남편이 눈치 채고 물어 본다.
‘헐 껴~?”
“됐~유~”(N0)
이 얼마나 간단 명료하고 신속한 대화인가? 충청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김정열, 김학래, 남희석, 서경석, 최병서, 이영자, 최양락, 황기순…
이들의 공통점은? 잘 알다시피 충남 출신 개그맨이다. 그럼 왜 개그맨 중에는 충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을까?
말이 느린 듯하나 함축적이며 우회적이고 때로는 기습적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추석 날 아침. 서울 사람이 서산에 있는 장인 집에 일찍 가서 인사하고 골프 나갈려고 급하게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좁은 시골 길이라 추월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앞에 가는 충남 번호 차가 너무 느리게 가는 것이었다.
조급증이 난 서울 사람이 크락션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올렸다 내렸다 해도 좀처럼 길을 비켜주지 않다가
마침내 충청도 사람이 차를 길가에 세우더니 차문을 열고 서울 차를 세웠다. 서울 사람이 긴장했다.
그러자 충청도 사람이 점잖게 한마디, 천천히 한다.
“아니~? 그렇게 급하시면 어제 저녁에 내려오지 그랬유~~?”
삿대질과 욕이 나올 줄 알고 긴장했던 서울 사람에게 이 얼마나 통쾌한 기습적 반전이며 훈계적 유머인가!
충청도 사람들은 속내를 먼저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협상의 달인이다.
충청도 어느 농가 부부가 마루에서 아침 밥을 먹고 잇는 데 이웃 집 아저씨가 온다.
밥 시간에 손님이 불쑥 와도 밥 대접하는 게 우리의 인심.
이웃집 아저씨 아침 밥도 얻어 먹고 막걸리까지 한 잔 얻어 마시고서도 좀처럼 갈 생각을 안하고 계속 이런 저런 애기 하며 앉아 있는다.
참다 지친 주인 아줌마가 먼저 물어 본다.
“그런데 용식 아버지, 아침 댓바람부터 우리 집엔 왜 오셨대유?”
그제서야 이웃집 아저씨 온 용건이 생각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한다.
”아이구 내 정신이야! 여기 낫 좀 있유?”
내가 충청도 사람의 이런 협상 전법을 인도에서 써 먹었다. 회사 보호 차원에서 부득이 인도 조폭 두목과 (대외적으로는 집권 정당의 청년분과위원회 위원장) 용역 계약 금액을 협상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쪽에서는 용역비로 50만 루피를 불렀고 나는 20만 루피를 고집해서 합의가 안 되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최후 담판을 하러 그 두목 집에 새벽 4시 반에 약속을 하고 그 집에 들어 갔다.
그 사람은 잠자다가 일어나 응접실에 나왔다. 난 한 시간 동안 김빼기 작전에 들어 갔다.
“아이고 이 소파 멋 있네유! 얼마 주고 샀유? 어디서 샀데유?
아이고! 이 그림 참 멋있네유. 화가 이름이 뭐래유? 어디 가면 살 수 있대유?
이 가구는 200년도 더 된 것 같으네유! 무슨 나무로 만든 거래유??” 등등.
나의 끊임없는 허드렛 질문에 드디어 그 두목,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어이, 미스터 진, 새벽부터 이런 애기 하려고 온 거 아니잖아? 좋아! 내가 10만 양보해서 40만으로 합시다.”
나는 천천히 답했다.
“25만으로 해유~.”
성질 급한 그 두목 “에이! 졸려 죽겠는데… 그래 30만으로 하지.”
이렇게 해서 한 시간 김 빼기 덕분에 협상은 2분만에 끝났다.
이게 충청도인의 끈기 있는 김 빼기 협상 전법이다.
충청도 사람은 같은 말이라도 긍정과 부정이 다 포함되는 것처럼 말한다. 듣는 사람이 주의 깊게 듣고 판단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내 보직은 서울 본사의 관재과장이었다.
관재과장은 부동산을 사고 팔고, 부동산 개발 및 건축에 관한 각종 인허가를 획득하는 게 주 임무였다.
그 때 충남 모 처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공장 건설 현장에서 긴급 SOS를 요청해 왔다.
회사 인허가 팀이 파견 나가 있었는데 그들이 경상도, 전라도 사람이라서 충청도 공무원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인허가가 안되니 충청도 사람인 내가 아산에 내려와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상황이었다.
충청도 사람인 담당 공무원 김 계장에게 우리 인허가 팀 경상도 직원이 가서 이야기했다.
‘”계장님, 오늘 복 날이라서 배나무 골에 보신탕 준비해 놨으니 저녁에 거기로 오시지요.”
“됐^유”
그날 저녁 아무리 기다려도 김 계장은 안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음날 인허가 팀 직원은 촌지 봉투를 준비해 가서 김 계장 옆에 붙어 봉투를 슬쩍 내밀며 한 마디 한다.
“계장님, 어제 저녁 보신탕 드시러 오신다 하더니 안 오시고… 이거 얼마 안되지만 휴가가실 때 여비 하세요”
”됐~~유~”
이 말에 그 직원은 또 헷갈린다.
어제도 ‘됐유’ 하고 안 왔으니 ‘됐유’가 분명 부정이라고 생각하고 내밀던 봉투를 슬그머니 빼서 다시 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와 버렸다.
이러니 인허가 업무가 제대로 추진될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 집에서도 발생했다. 신혼 때 우리 집에 아버지가 올라 오셨다. 저녁상 물리자 경상도 새댁인 와이프가 물었다.
“아버님에~ 디저트로 과일 드릴까에?”
“됐~다~”
이 말에 아버지는 먹고 싶었던 과일도 못 드시고 …그렇다고 체면상 달라고 말씀도 못하시고…
다 내 불찰이었다. 와이프에게 충청도 말 뜻을 잘 가르쳤어야 했는데…. 불효자의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2015.7.
自仁雜說 (9)
빼뺴로 단상
1984년 3월 말, 아직 아침 저녁으로 살얼음의 냉기가 대지 및 훈련소에 남아 있어 모든 것이 을씨년스럽게 기억되는
내 젊음 시절의 한 때이다.
아침에는 얼었다가 낮에는 녹아 질퍽해진 황산벌 각개 전투장에서 낮은 포복, 높은 포복 등 박박 기다 보면 황톳 물이 안으로 스며들어가
군용 하얀 면 팬티가 누렇게 물들었다.
훈련 기간 중 제일 싫은 것이 야간 화장실 동초 서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병영 생활이 즐거운 것은 아닐 것이다.
모두 잠 자는 시간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화장실 앞에서 서 있는 근무를 한다.
밤에 화장실에 들어간 훈련병이 3분이 지났는데도 안 나오면 화장실 문을 뚜드린다. 반응이 있으면 좀 더 기다리고 반응이 없으면 바로 신고해야 한다.
즉, 야간 동초의 주 된 임무는 화장실에서의 자살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끈달린 수세식 화장실 머리 위에 있는 물통에 목 매다는 사태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훈련소 26연대에서 고난의 훈련 과정을 마치고 더블 백을 어깨에 맨 채 연무대 역으로 걸어 가는 날 저녁은 내 자신이 자랑스럽고
새로운 곳에서는 좀 편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신병을 가득 실은 수송 열차가 연무대 역을 천천히 출발하였고,
우리는 어디에서 하차할 지 모르는 채 기대 반 두려움 반에 김 밥을 사먹었다.
그때 열차 안에서 먹은 김 밥은 내 생애 가장 맛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매일 훈련소 짬 밥만 먹다가 사제 김밥을 사먹으니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더 먹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 김밥의 단무지 맛이 아직 혀끝에 여운 지어 있었지만 설렘과 기대도 잠깐이었고,
훈련소를 나오면서 받은 형의 편지를 읽으니 다시 맘이 무거워졌다. 어머니의 지병이 날로 악화된다는 내용이었다.
차창 밖을 멍하니 계속 응시하다 보니 편찮으신 어머니 얼굴이 어둠 속에 나타났다가 흔들리며 지나간다.
새벽 열차 안에서 잠깐 잔 것 같은데 기간병이 내 이름을 부르며 하차 준비를 하라고 성화를 낸다.
첫 열차의 정류장에서 내리는 신병은 나를 포함해서 열 명 내외였다.
열차가 서울을 통과할 때까지 못 내리면 전방 근무이니 고생길이 훤하다는 말을 듣고 눈을 붙였는데 제일 먼저 내리라니 이런 행운이….
경기도 평택쯤 온 줄 알고 내렸는데 동이 터서 살펴 보니 아직도 충청도 서대전 역이었다.
거기 사단에서 몇 일 머무르다가 다시 따블 백을 매고 열차를 탔다. 천안 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갈아타고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예산, 홍성을 거쳐 내 고향 광천 역에 정차했는데도 인솔 기간병은 내릴 기미를 전혀 안 보인다.
여기서 내리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만 뒤에 남기고 열차는 계속 남행하더니 대천을 지나 보령군 주산에서 하차하였다.
거기 연대에 대기병으로 몇 주 머무르게 되었다.
사단, 연대 대기병 시절에 대졸자 신분인 나에게 당연히 여러 번의 테스트가 들어 왔다.
행정병으로 쓸려고 백지를 주면서 글씨를 쓰라고 했다. 무슨 글씨를 쓰면 되냐고 반문하니 인사 장교가 아무 것이나 써 보라 한다.
처음에는 고 3때 한문, 고전 선생님이 재미로 알려 준 김 삿갓의 해학적 한시(漢詩)를 세로로 써 보였다.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후원황률불봉탁)”
* 坼: 터질 탁
당연히 한 대 쥐어 맞고 번번히 탈락되었다.
한 번은 어느 장교가 이 시 구절이 무엇의 댓구(對句)인지를 알아 채고 재미 있다며 다른 것을 써보라 하길래,
이번에는 그 장교를 골탕 먹이고자, 교련선생님이 자주 애기 하던 반야심경 중의 마지막 부분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詞(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을 한자로 갈겨 써 보이며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시건방지게 되물었다.
결국 한 대 얻어 터진다. 이쯤 되면 그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확정되었다.
“고문관”. 내가 원하던 바였다.
본부 행정병에서 탈락되고 말단 부대 소총수로 내 고향 집 가까이로 배치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 지고 있었다.
그 때 행정반 최고참이 나를 데리고 일과 시간에 바둑을 자주 두었다.
그는 바둑 시작하기 전에 관물대에서 뺴빼로를 두 갑 꺼내 와서는 혼자 아그작 아그작 앞니로 베어 먹으면서 바둑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먹으라는 말은 절대 안 한다. 날 침 흘리게 만들어 내 주의를 흩트려 놓고서는 이기려는 심보였다.
고참이 먹는 것이니 함부로 손을 내밀어 먹을 수도 없었고….
그 때 얼마나 빼뺴로가 먹고 싶었던지 말로 표현이 다 안 된다. 난 그에 대한 응징으로 필사적으로 대마를 잡아 이겼다.
한 번은 판세가 내게 불리해졌다. 내가 당황하는 꼴을 본 그가 그제서야 빼빼로 하나 먹어 보라고 권한다.
빼빼로를 서너 개 먹다 보니 묘수가 생각나 오히려 내가 그의 대마를 잡게 되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빼빼로를 다시 빼앗아 가더니 바로 바둑판을 뒤엎어 버렸다.
그리고 화가 나서 행정병을 불러 지시했다.
“야, 이 고문관은 눈치라곤 하나도 없고 고집만 센 놈이니 섬으로 보내!”
그래서 난 대천 및 안면도 앞바다의 이 섬 저 섬에서 섬 생활의 낭만을 즐기며 편하게 근무하게 되었고,
그 때 입대 동기가 자주 불러서 나도 가장 좋아하게 된 노래가 ‘해당화 피고지는’으로 시작하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이었다.
그러다가 말년 병장 시절에는 고향집 앞 40리 앞 육지에 전진 배치될 수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으로서는 어머니 계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곧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49재 동안 어머니를 모신 절까지 나는 매주 부대에서 자전거 타고 나올 수 있는 특전을 누렸다.
되돌아 보면 다 빼빼로 덕분이다.
지난 주 11월 11일 소위 ‘빼빼로 데이’라고 제과 업체의 상술에 따라 온 나라 청소년들이 떠들썩 했다.
공식적으로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흑 토(土) 자를 파자(破字)하면 십일(十一)이 되기 때문이고, 뺴뺴로 대신 쌀 소비를 높이기 위해 가래 떡을 많이 먹으라는 ‘가래떡 Day’ 이기도 하다.
중국에 출장 간 친구가 알려 준 바에 따르면, 그 날은 중국에서는 ‘광군제’라 하여 최대 쇼핑의 날이고
중국 판 Black Friday 라 하여 경기를 살리고자 소비를 진작 시킨다 한다.
중국 발 경기 침체로 브라질과 자동차 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남 중국해 문제 등 중국과 미국의 알력 사이에서, 너무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나라 중국!
언제나 우린 중국으로부터 홀가분 해질 수 있을까?
중국과 미국 틈에서 빼빼로처럼 빼빼 말라가지 말고, 가래 떡처럼 굵어져 가야 하는데....
2015.11.
自仁雜說(19)‘변또(1)’
몇 일 전 브라질에서 보낸 이삿짐이 인도에 도착했다. 이삿짐은 배에 실려 브라질을 떠난 지 1년 반 만에 나한테 배달된 것이다.
한국의 보세 창고에서 1년 넘게 있다가 내가 인도에 집을 얻고 정착하니 다시 배를 타고 주인 찾아 온 것이니 반갑기도 했다.
박스를 열고 둘둘 말린 뽁뽁이나 포장 종이를 벗겨 내면서 내 물건이 하나 하나 나올 때는 마치 잊어 버렸던 보물을 되찾기나 한 듯 반가웠다. 골프 대회 트로피들, 만년필, 가짜 롤렉스 시계, 사진 액자 등이 반가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것은 22년 해외 주재원 생활하는 동안 모아 놓은 나의 업무 비망록 노트들이 무사히 내게 돌아 왔다는 것이었다.
대학 노트나 일반 다이어리에 그날 그날 적어 놓은 비망록을 펼쳐 보면 아무리 오랜 된 세월이지만 그 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언젠가는 이 다이어리 비망록을 전부 뒤져서 나의 직장 생활 회고록을 쓰되, 후배들에게 무언가는 도움이 되고 흥미 있도록 실패와 부족했던 점을 솔직하게 가감 없이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쓰자는 것이 나의 오랜 된 ‘To Do List’이다.
그 실패나 성공 에피소드 각각에 고사성어를 하나씩 제목으로 달아 가며 쓰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맘 속 계획이다.
오늘로써 현대자동차 그룹에서 일한 지 만 32년을 채웠다.
그 32년 동안 인도에서 출발하여 미국, 브라질, 한국을 거쳐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에 각각
두 번씩 입사한 것으로 내 인사 기록카드에 나온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일할 지는 모르겠지만 은퇴하게 되면 이런 집필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사주(四柱)를 보면 기록을 꼼꼼히 잘하는 성격이라고 나온다.
나의 고등학교 3년 동안(1976년 3월~1978년 12월) 조그만 잡기장에 줄을 그어 금전 출납부를 만들었다.
졸업할 때 집계해 보니 총 지출액이 100만원이 조금 못 되는 99만 얼마였다.
물론 3년 동안의 하숙비가 그 지출의 대부분이었지만, 그 당시 도화지 한 장, 백노지 한 묶음 등 세세한 지출 항목을 모두 기록했었는데
아쉽게도 역마살 인생이라 이리 저리 이사 다니는 통에 분실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귀중한 기록을 분실한 게 너무나도 애석하고 안타깝다.
종이의 기록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어릴 적의 빛 바랜 기록,
또는 곧 끊어질 것 같은 비가 죽죽 흐르는 아날로그 필름에 아슬아슬하게 담겨있는 영상 기억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기록 내지 기억들도 이순(耳順)을 앞 둔 오래된 용기(容器) 속에 담겨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자꾸 Fade out 되어 곧 삭제될 것 같다.
그래서 내 뇌간에 아무렇게도 방치되어 산재된 이 아날로그 메모리 칩들도 차근차근 모아서 지워지지 않도록 디지탈화 해 놓고 싶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변또’에 대해서.
한 달 전 인도 남중부 함피(Hampi) 유적지에 갈 때 일이었다. 차로 가는 데만 6시간이니 점심 먹을 일이 걱정이었다.
그 주변에 점심 먹을 식당은 물론 없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기로 했다.
아침 먹고 남은 밥에 김을 부셔 넣고 둘둘 뭉쳐서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차 안에서 먹는 그 주먹밥은 별미였고 참 좋았는데, 그것은 초등학교 1학년 첫 봄 소풍 때부터 대학 때까지의 도시락
아니 변또에 대한 가난하고도 아스라한 기억들을 시리즈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1967년 5월 초였을 것이다. 학교 들어 가서 처음 가는 봄 소풍이었다.
못자리 만들고 파종해야 하는 농번기의 바쁜 아침에 첫 소풍의 설렘을 못 이겨 부엌 주변을 서성거리며 재촉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두툼하고 찌그러진 누런 양은 변또 하나를 주셨다.
나는 책보를 마루에 펴고 변또를 대각선 중앙에 놓고 둘둘 만 다음, 책보 양끝을 한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둘러 매고,
배 앞에서 양끝을 당겨 매듭 묶고 학교로 달려 나갔다.
(변또, 출처 Naver 이미지)
운동장에 모여서 보니 1학년 첫 봄 소풍이라고 몇몇 학부모와 할매들이 따라 오셨다.
할매들은 소풍 가는 것을 ‘원적 간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안 쓰이는 말이라서 그런지 ‘원적’은 네이버(Naver) 어학 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이다.
굳이 한자로 쓴다면 멀리 발 자취를 남긴다라는 뜻에서 ‘遠跡(원적)’이 되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아니면 원족(멀 遠 자에 발 足 자)을 충청도 할매들이 원적이라 발음한 것 같기도 하다.
한 십 리쯤 걸어가 작은 동산 소나무 숲에 모여 앉아 노래도 부르고 보물찾기도 했다.
소나무 밑둥이나 바위 틈에 끼어진 조그만 종이 쪽지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깨에 맨 변또가 거추장스러웠다.
할매나 부모님이 따라온 애들은 변또 걱정 없이 재빠르게 뛰어 다니니 보물 쪽지를 많이 찾아 냈지만 난 하나로 찾지 못해 속이 상했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반장 부모가 싸 온 담임 여선생님 변또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았다.
다들 한석봉 어머니가 썰어 넣은 듯한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정돈된 김밥이었다. 내 것도 그러려니 하고 변또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이 무슨 해괴한 모습이던가? 가지런한 떡국 모양의 김 밥이 아니라 썰지 않은 길쭉한 통 김밥이 세 줄이나 그대로 들어 있었고
그 옆의 노란 무우 하나도 통째로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나는 어머니가 바빠서 김 밥과 단무지를 썰어 넣는 것을 잊어 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만 다른 모양의 김밥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하여 그 자리에 앉아 먹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남들은 다 와루바시로 김 밥을 하나 하나 집어 먹는데 내 변또에는 와르바시는 고사하고 당시 집에서 쓰던 놋쇠 젓가락도 없었다.
슬그머니 변또 뚜껑을 닫고 일어나 아무도 없는 소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배는 고팠으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다시 변또를 열고 김밥 한 줄을 손에 잡고 베어 먹기 시작했다.
김 밥 두 입 먹고 변또 뚜껑에 놓은 다음 노란 무우를 집어 들고 한 입 와지끈 베어 먹고….
그 때 같은 반 친구 한 녀석이 멋 적게 씨익 웃으며 다가 왔다.
별로 친하게 지내던 애도 아니라서 난 순간 경계심에 책보로 변또를 덮었는데 그 친구는 내 옆에 앉아 변또를 열었다.
같은 통 김밥에 통 무우였다. 우린 동병상련의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말없이 그러나 창피한 마음만은 떨쳐 버리고 편안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 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불평하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통으로 먹는 것이 더 맛있는 거라 대답하시며 별로 신경을 안 쓰셨다.
나중에 김 밥 마는 것을 보니 그 때 우리 집에는 김밥용 발이 없었던 것이 그 통 김밥의 이유였다고 추측된다.
김 밥은 발을 가지고 힘을 꽉 줘서 단단하게 말아야 옆구리가 안 터지고 잘 썰어 지는 게 아니던가?
2018. 5. 인도에서
自仁雜說(20): ‘변또(2)’
초등학교는 내 집 바로 앞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점심 후에도 수업을 해야 하니 도시락을 싸 오라고 담임 선생임이 엄명하셨지만 난 찬 밥 먹는 것이 싫어서 도시락을 안 싸가지고 갔다.
혼식을 강요하는 시대였으니 점심 시간에 담임 선생님도 교실에서 같이 도시락을 까 드셨다. 우리 급우들은 그렇게 나라에서 강요 안 해도 자연 보리가 반이 넘는 도시락을 싸 올 수밖에 없는 그 시절의 그 형편이었다.
일부 친구는 통치미 하나를 반찬이라고 변또 속에 싸왔다.
그것은 동치미 바탱이(항아리)에서 허옇게 뜬 발효 물질을 뒤집어 쓴 무우 하나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보리 밥 위에 푹 찔러 얹혀 온 것이다. 그는 한 손으로 그 통 무우를 아그작 아그작 베어 먹으며 변또를 잘도 비웠다.
그렇게 다들 점심 먹는 동안에도 나는 꿈쩍없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변또 뚜껑에 십시일반으로 보리 밥을 모아 갖다 주었지만 나는 거부하고 안 먹었다.
이런 상황이 몇 일 가자 선생님은 나만 특별히 점심 시간에 집에 가서 밥 먹고 오는 것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다.
단식 투쟁의 승리였다.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중학교는 십 리 밖 읍내에 있었고 나는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교 1학년3월부터 도시락 먹는 일이 제일 힘겨웠다.
3월이라 날씨는 아직 쌀쌀하였고 차디 찬 변또를 까먹는 것은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입이 짧은 나는 찬 밥을 삼키는 게 너무나 힘들어서 먹는 속도가 엄청 늦었다.
다른 친구들이 도시락 다 먹고 교실 밖으로 놀러 나갈 때쯤이면 나는 겨우 반정도 먹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도시락을 반쯤 남기고 집에 가져왔다. 집에서 도시락 싸 준 누나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나중에는 남은 밥을 하교 길에 있는 우리 논에 버리고 왔다.
우리 논에 거름이라도 되게 할 요량으로 남의 논에는 버리지 않았다.
내가 찬 밥을 잘 먹지 못했던 주된 이유는 도시락 반찬이 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변또 내에 있는 조그만 반찬 통에는 거의 매일 도라지 나물이나 마늘 쫑 또는 깍두기로 채워졌다.
교과서 3권을 합한 정도로 크고 두꺼운 양은 변또는 책가방에 세로로 세워 넣어서 들고 등교해야 했다.
변또의 한 부속품인 반찬 통에는 따로 뚜껑이 없었기 때문에 변또는 항상 반찬 용기 쪽이 위로 가게 신경 써야 했다.
만일 실수로 그 부분이 아래로 가면 가방에 깍두기 국물이나 마늘 쫑 물이 흘러나와 가방도 책도 다 냄새 나게 배어 들었다.
(사진출처: 네이버)
1학년 중간 고사 성적이 발표된 후 광천 읍내에서 잘 사는 집의 아들이 내 짝이 되었다.
그 친구는 간질을 앓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정상이지만 가끔 간질이 발작되면 입에 거품을 물고 교실 바닥에 누웠다.
그런 그를 친구들이 놀려대고 무시했다. 속 상한 그의 부모는 담임 선생에게 부탁하여 가장 얌전한 범생이와 같이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의 짝꿍이 되어 나도 그의 덕을 봤다. 그는 당시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보온 도시락과 별도로 된 푸짐한 반찬 통을 따로 들고 등교했다.
그의 반찬은 계란 후라이, 오뎅 그리고 쏘세지가 주종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같이 먹으면서 나도 내 도시락을 다 비울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간질병 때문에 휴학했다.
그 후 새로운 베프(Best friend)가 생겼다.
입이 얼마나 큰지 웃으면 입 가장 자리가 귀에 걸리는 그는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변또 반찬은 항상 변함없이 새우젓이었다.
그는 나보다 키가 커서 두 세줄 내 뒤에 앉았지만 점심 시간이 되면 변또를 들고 내 자리로 와서 서서 같이 먹었다.
그와 나는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새우젓에 질린 그는 내 반찬이 먹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의리상 그의 새우젓도 집어 먹어야 했다. 엄청 짜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파리 만한 새우 한 마리씩 살짝 살짝 건져 먹어야 했었다.
지금은 김치 담글 때나 돼지 고기 수육을 먹을 때의 광천 특산물 양념이지만 그 때 변또 반찬으로 새우젓을 싸온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가난의 소치였다. 당시 반찬의 기능은 싱거운 맨 밥을 먹기 위한 짠 맛에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서민층은 반찬을 짜다는 의미의 ‘건건이’라 불렀다.
(내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중3이 되었다. 우리 동기는 전체 6학급이었는대 그 중 한 학급은 우수 반이라 하여 전교 60등이내에 드는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 때 백(白)가 성을 가진 급우가 내 베프가 되었다.
그는 읍내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하교 길에 가끔 내 자전거를 같이 타고 우리 집까지 오고 나머지 20리 길은 걸어서 갔다.
그는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상태였다.
나는 그 때도 가끔 변또를 다 못 비우고 남은 밥은 논에 버리곤 했었다. 점심 시간에 내 변또를 비우는 데 그가 도와 주는 우정도 발휘했다.
매일 같이 내 도시락 먹는 게 주변의 눈 때문에 자존심 상한 그는 어느 날 매점에 가서 빵을 사먹는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매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수도가로 가서 물로 배를 채우고 온다는 사실을.
항상 기운이 없어 자근자근 속삭이듯 애기하던 그는 착하고 순수했다.
나는 동성 연애하듯 그의 마른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았지만, 눈만 휑한 그의 얼굴에는 마른 버짐이 가시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으로 그와 헤어진 후 40년만에 밴드 덕분에 그의 전화 번호를 알게 되어 설레는 맘으로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울산에서 조그만 영어 학원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 후 온갖 고생 후 어찌 어찌해서 방통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영어 학원을 한다고 했다. 과연 똑똑한 친구였다. 서로의 지나온 길을 확인하여 궁금증을 푼 후 우린 서로 ‘언제 한 번 만나자’라는 의례적인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가슴 속에 있는 서로의 좋은 추억을 길이 보전하는 데에는 안 만나는 것도 그 한 방안이라는 것을 지나온 인생에서 터득하지 못할 만큼 우린 아둔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고(故)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라는 수필을 읽었고, 어느 방송국에서 아끼꼬를 수소문해서 찾아 대기시켜 놓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생 방송을 통한 극적인 상봉을 유도했지만 피천득 선생이 거부했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기에….
2018.6
自仁雜說(21): ‘변또(3)’
1976년 3월 공주에 있는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변또 들고 등교하는 번거로움도 찬 밥 먹어야 하는 고역도 사라졌다.
점심 시간에는 하숙 집으로 쪼르륵 달려가서 따뜻한 밥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었으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식욕도 돋고 밥 먹는 속도도 변또 밥보다 훨씬 빨랐다. 그러나 이 행복도 얼마 못 가 몇 달 만에 끝났고, 전국적인 쌀 부족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혼, 분식이 거의 강제적으로 실시되면서 다시 변또를 싸가지고 등교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다만 변또가 아니라 도시락이 되었다. 교과서 3권 두께의 두툼한 변또가 아니라, 면적은 A4 사이즈로 커졌지만 두께가 책 한 권 정도로 얇아진 날렵한 모양에, 반찬 통은 밀폐 형으로 별도로 있어 반찬 국물이 흘러 나오는 일은 없게 되었다.
점심 시간에 안경 쓴 교감 선생님이 각 반을 돌면서 직접 도시락 검사를 하셨다.
그 때 도시락 반찬을 보면 각 하숙집의 정성과 맛을 비교할 수 있었다.
쌀로 하숙비를 냈는데 보리 밥을 먹어야 하는 게 하숙생인 나의 입장에서는 억울했다.
하숙 집 주인 입장에서는 하숙생이 집에 와서 점심 먹고 가는 것보다 각 하숙생들에게 도시락을 싸 주는 것이 노동 측면에서 번거롭기도 했고 경제적으로도 손해였다.
오뎅, 계란, 김, 생선 그리고 보리 등 하숙집의 주, 부식 지출이 커졌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하숙생에게 전이되었다.
때마침 정부의 요구로 실시되는 반상회는 하숙집 아줌마들이 모여 하숙비 인상에 대해 담합하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
그들은 반상회에서 기존의 쌀 6말 집, 7말 집, 8말 집이라 등급과 매달 하숙비를 쌀로 받거나 쌀값에 연동되는 기존의 관행을 없애고
정액의 현찰 하숙비를 받기로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그 후 하숙생들은 도시락 반찬이 점점 부실화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나의 이런 고통은 근원적으로는 정부가 안겨 준 것이었다.
혼, 분식 강요만 없었더라면 고등학교 3년 동안 무거운 책 가방에 도시락까지 끼어 가지고 다녀야 했던 고통은 없었을 텐데….
고 2 때에 기거했던 하숙집의 주인 어른은 어느 학교 수학 선생님이었는데 당뇨병이 심해 휴직하고 치료 중이었다.
하숙생이 3명이었는데 반찬이 싱겁고 맛이 없고 채식 위주였다. 입이 짧은 나는 영양 실조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 선생님 집 형편을 보고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반찬 개선을 요구하지는 못하고 간접적인 항의를 했다.
하숙집 주인하고 아침 저녁을 같이 먹으므로 반찬은 손도 안대고 바로 찬물에 밥만 말아 먹었다.
무언의 항의였지만 하숙집 아줌마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셨고 개선은 전혀 되지 않았다.
두 번째 항의는 내 방 밖에 있는 멍멍이를 이용하였다.
시끄러워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멍멍이게 재갈을 물리고 고무줄로 꽁꽁 입을 묶어 버렸다.
이 정도면 하숙집 아줌마가 눈치 채고 반찬이 좀 개선될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결과는 뜻 밖이었다.
어느 날 하교하여 하숙집에 들어가니 고깃국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주인 집 아줌마는 사람을 시켜 봉황산 나무에 그 개를 매달아 잡아 수육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반찬 싸움에 멍멍이만 희생되었다.
대학에 갔다. 용돈이 충분하지 못한 나에게 매일 라면이나 구내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것은 언감생심 사치였다.
당시 남자 대학생 가방은 도시락을 담고 다니기에는 좀 불편한 구조였다. 가방 위에서 아가리 형식으로 좌우로 펼쳐 열고 그 위에 손잡이가 달린 것이었는데, 도시락과 유리 반찬 병을 넣고 나면 책이 몇 권 못 들어 갔다. 근본적으로 대학생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으로 전제하여 디자인된 가방이었다.
봄에는 아직 날씨가 쌀쌀해 학생 식당에서 차디찬 도시락 밥을 까먹는 게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몇 십 원 했던 우동 국물만 사서 거기에 찬 밥을 풀어 넣어 먹는 방법을 썼다.
2학년 때부터는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한다고 형수에게 도시락 두 개(점심과 저녁)를 싸달라고 했다.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도 점심 시간과 저녁 시간이 되면 신촌 철 다리 밑의 분식 집이나 한식 집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 오는 친구들의 입에서 풍기는 냄새가 한 없이 부러웠다. 도시락은 두 개였지만 반찬은 늘 김치 유리병 하나였다.
억지로 찬 도시락 밥을 먹은 후에는 곧바로 식당 옆 벤치에 앉아 거북선이나 태양 또는 솔 등 당시 최고급 불쏘시개(담배)로 불을 지펴야만 속이 좀 따뜻해지고 소화가 되는 것 같았다. 아궁이에 불 때듯이….
담배 한 갑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용돈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한 갑에 20개비이니 하루에 3까치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고 식후에만 한 까치씩 피웠다.
담배의 효용은 식사 직후가 최고로 높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지니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식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꼭 담배가 땡기는 때에는 담배를 가방에 감추어 놓고 나가,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담배 피고 있는 친구에게 빈대 붙을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이나 일, 공휴일에는 식당이 안 열어 도시락 먹을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시락을 두 개씩 가지고 도서관에 나왔다.
점심 시간이 되면 혼자 캠퍼스 숲 속에 들어가 가방을 식탁 삼아 도시락을 까먹었다.
하루는 젓가락을 안 가지고 와서 나뭇가지를 꺾어 도시락을 먹었던 쓸쓸한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신촌 사거리 창천동에서 자취하는 친구가 생겼다. 그는 형제들과 방 하나를 얻어 자취하는데 그의 큰 어머니께서 오셔서 밥을 해 주시고 있었다. 그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그 친구 덕분에 토, 일요일에 찬 도시락을 혼자 쓸쓸히 먹는 외로움과 처량함은 면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그 친구 집에 가면 큰 어머니께서 내 도시락 밥을 비우시고 대신 따뜻한 밥과 반찬을 내 주셨다.
내 딸들은 전혀 이해 못할 격세지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이지만,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한국의 각 학교에서 급식을 해주니 이 얼마나 좋은 복지 국가인가? 통 깁밥도 통 동치미도 반찬 국물 흐르는 변또도 걱정할 필요 없는 우리 나라 참 좋은 나라 아닌가?
선진국 미국에 있는 현대, 기아 자동차 공장에 다니는 생산직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구내 식당에서 점심 사먹는 돈이 아까워
아직도 도시락을 싸온다. 지금 나는 여기 인도 공장 근로자에게는 무제한으로 공짜 밥을 제공하려고 식당을 크게 짓고 있다.
단체 급식이든 외식 산업이든 먹는 것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선진국이다.
값싸고 신속하고 맛있고. 이 모든 게 변또로 인한 고생을 맛 본 뒤의 달콤함 아닐까?
끝
2018.6 인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