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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의환 Mar 11. 2024

청출어람이 아니고 문일지십이다!


미국의 GE와 Pratt & Whitney , 영국의 Rolls-Royce, 독일의 BMW 그리고 일본의 미쯔비시, 이 다섯 회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20세기 초부터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회사이다. 1903년 미국 라이트(Wright) 형제가 ‘Flying Machine’이란 이름으로 동력 비행기를 처음 선보였고, 1906년 브라질의 산토스 두몽(A. Santos Dumont)은 파리 에펠탑 상공에서 50마력 엔진을 탑재하여 비행에 성공한 후 항공기 개발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당시 항공기 개발의 주 목적은 전쟁이었으므로 발주자는 군이었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의 발명에 대하여 특허 등록을 했지만, 산토스 두몽은 자신의 비행기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특허신청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 발명 3인의 공통점은 비행기 개발에 열정을 쏟다 보니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이 아니라 인류의 평화와 복지에 쓰이길 간절히 원했다는 점이다. 라이트 형제 중 동생 오빌은 2차 세계대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는 인류역사에서 ‘불’과 같다. 나는 내가 발명한 ‘불’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만, 그 ‘불’을 활용한 인류의 복지를 생각하면 후회하지 않는다.”


라이트 형제와 산토스 두몽이 지금도 위대한 엔지니어(Engineer)로 추앙 받는 이유는 그들은 창의성 때문이다. 창의성이란 단어 ‘Ingenuity”는 엔지니어와 공학(Engineering)의 필수요소이다. 엔지니어라는 단어는 ‘Engine + er’ ‘이니 ‘엔진을 다루는 사람’이란 뜻으로 출발하였다. 엔진은 ‘열 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장치’이다. 산업혁명 이후 초기 엔진은 증기기관이 대종이었으므로 기관사를 엔지니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항공기 엔진의 수요와 그 발달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볼 때 군사적 목적은 엔지니어링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전쟁을 위해 야전에서 진지를 쌓거나 참호를 파고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군사 목적의 엔지니어링을 ‘Military Engineering’이라 했다. 거기서 축적된 토목기술을 민간을 위해 사용할 때, 군사용과 구별하기 위해 ‘Civil Engineering’이라 칭하면서 개념 구분하였으니 그것이 현재의 ‘토목공학’이다.

밀리터리 엔지니어링은 결국 민간(Civil)의 기술발전으로 이어졌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미쯔비시에 고공 전투에 적합하도록 기동성 있고, 가볍고 그리고 기체 선회 능력이 좋은 함재기와 그 엔진을 개발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렇게 개발된 것이 ‘제로센’ 함재기이다.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저서도 있듯이, 일본 엔지니어들은 무엇이든 작게 만드는 것은 잘한다. 그들은 기동성과 긴 비행 거리를 위해  제로센 조종석 주변과 연료탱크의 방탄 장치를 없애서 비행기 무게를 줄였다. 이 전투기는 진주만 기습에서 미국을 놀라게 하며 유명해졌지만, 방탄 되지 않은 것이 치명적 약점이었다. 이 약점 때문에 제로센은 미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 항상 열세였다. 이에 일본군은 제로센을 자살공격 즉 가미카제 용으로 쓰는 무모함을 보였다. 작고 가볍게 한 것이 제로센의 약점이었지만, 자동차에서는 강점으로 작용하여 1980년대 이후 미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었다.


제로센 전투기를 만들었던 미쯔비시는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고 1970년에는 크라이슬러와 합작하여 미쯔비시자동차회사(이하 “MMC”라 약칭)를 설립했다. 1930년 대 말 미쯔비시에서 제로센 엔진을 개발하던 엔지니어 구보 토미오(久保 富夫)가 1973년부터 MMC의 사장을 맡았다. 그는 스스로 백제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충남 부여를 방문했던 사람이다. 한편 1967년에 설립된 국내 H 사는 Ford의 조립자(Assembler)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Ford 가 결별을 선언하니 기술 제공자를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때 구보 사장은 외형을 키워 일본 제 2의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하길 원했으므로,  H사에 기술을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그 기술을 활용하여 1975년 탄생한 것이 한국의 최초 독자 모델인 포니이다. 


MMC로부터의 기술을 배우는 동안 H 사의 엔지니어들은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과 열의의 학생들이었다. 기술이전계약에 의거하여 기술을 가르쳐 주는 MMC였지만, 그들의 태도는 항상 갑(甲)으로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기술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만 가르쳐 주면서 오랫동안 로열티만 받아내려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H 사가 엑셀을 미국에 수출하며 한참 기세를 올리던1988년에 800억원의 순이익을 냈지만, 그 해 MMC에 낸 로열티는 약 450억원이나 되었다. 따라서 당시 H 사로서는 하루 빨리 기술을 배우고 개발하여 MMC에 로열티를 안 내게 되는 것이 독자적으로 살아 남기 위한 선결 조건이었다. 


이런 형편이니 H 사의 엔지니어들은 그들의 오만과 거들먹거림을 다 인내하면서 기술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H 사의 엔지니어 열 댓 명이 일본 MMC 공장에 견학을 갔다. MMC는 공장 내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견학 내내 H 사 엔지니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들은 각자 공장 내부를 눈짓 손짓으로 분할하여 각자 맡은 부분을 자세히 보면서 기계배치, 작업흐름, 자재와 원료 등을 파악하여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자재의 성분을 알아내는 역할을 받은 엔지니어는 미리 머리칼에 당시 유행하던 헤어무스를 진하게 바르고 갔다. 가공 기계 옆에 수북이 쌓인 쇳가루를 만져 본 그는 머리를 쓰다듬는 척 하면서 그 쇳가루를 머리에 바르고 나왔다. 공장 견학을 마친 그들은 재빠르게 호텔에 모여서 각자 본 구역의 기계배치 및 작업순서 등을 손으로 그려냈고, 헤어무스에 묻은 쇳가루를 모아내서 한국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 H사는 성장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1986년 1월에는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H사 제품은 미국에서 엑셀과 콜트라는 브랜드로 동시에 팔렸다. 미쯔비시는 H 사로부터 제품을 받아 H 사 엠블렘을 떼고 거기에 MMC 엠블렘을 붙여 ‘COLT’라는 브랜드로 팔았다. 하나의 제품을 여러 브랜드로 나누어 파는 이른바 ‘뱃지 엔지니어링 (Badge Engineering)’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H 사는 독자 기술로 엔진을 만들 실력은 못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H 사는  미국 GM에 근무하던 한국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해서 독자적으로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이런 움직임을 알아차린 MMC는 로열티를 반으로 깎아 주겠으니 엔진 개발은 중단하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H사의 최고 경영자는 엔진 개발을 계속 밀어 부쳤고, 마침내 1991년에 독자 엔진 개발에 성공하였다. 

닛산을 제치고 일본 제2의 자동차메이커 자리를 노리던 MMC는 결국 경영진의 오만과 해이함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빠져 들었다. 1996년 미국 일리노이즈 주에 위치한 MMC 공장에서 성희롱 사건이 터졌다. 성희롱을 당한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에 이의 해결을 요구하였으나 경영진은 묵살했다. 결국 그 사건은 300여명의 여직원들이 집단 소송을 제기하였고 MMC는 약 380억원의 배상금을 내고 사건을 무마시켰으나 이미 기업의 이미지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이어 2002년 MMC 상용차에 심각한 결함이 발생했다. 내부 엔지니어들이 이를 보고했지만 경영진은 이를 무시하고 은폐했다. 결국 한 운전자의 사망 사건으로 이 은폐 사건이 폭로됨으로써 MMC의 판매는 56% 이상 폭락하였다. 치명타는  2016년에 터진 연비 조작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H 사가 독자 엔진 개발을 성공한 1991년부터 MMC는 타이어와 공기 저항수치를 조작하여 연비를 조작하고 은폐하기 시작했다. 결국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어 이것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MMC는 닛산에 2016년에 흡수 당해 독자적인 자동차회사로서는 명을 다했다. MMC는 망하기 전인 2003년부터 왕년의 피교육생 H사에 오히려 로열티를 지급하기 시작했으며, H사가 독자 개발한 엔진을 사다가 자사 제품에 장착하는 인생역전(?)의 쓴맛을 봐야 했다. 


 H 사와 MMC의 이런 역사적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흔히 이를 두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적절한 비유가 아니다. 청출어람은 스승이 열과 성을 다하여 자신보다 더 나은 제자를 키울 때 쓰는 말이다. 공자의 교육방식은 거일반삼(擧一反三)이다. 스승이 하나를 알려 주면(擧一), 제자들이 스스로 깨닫고 나머지 3을 다 알게 되는(反三) 방식으로 청출어람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다. 거일반삼의 교육방법이 효과를 내려면 제자에게는 하나를 듣고 열을 알고자 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태도가 필요하다. 위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MMC는 청출어람의 제자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H 사의 엔지니어들은 문일지십의 열정과 애사심으로 똘똘 무장한 상태였다. 

기업간의 거래에서 거일반삼의 기술제공자는 없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는 기업은 문일지십의 열정적 태도를 가져야만 빨리 독립할 수 있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소프트랜더스㈜ 고문/ 전 현대자동차 중남미권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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