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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29. 2024

오랜만입니다

가난한 작가지망생의 고충


 내 삶을,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가난한 작가지망생의 삶을 택했었다. 삼십 대, 카페에서 파트타이머와 매니저의 그 어느 경계 즈음에서 일을 하며 글을 쓴 지 어언 2년이 흐르고, 물가는 오르고 생활은 점점 압박되면서 젊은 나이지만 멋 부리는 것에도, 여행에도 관심이 없어지고 점점 나에게 쓰는 돈이 아까워졌다. 궁핍한 삶을 살다 보니 ‘답은 로또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지금이야 이렇게라도 아껴가며 먹고살지만 앞으로의 내 삶에 미래가 있을까? 한평생 이렇게 돈도 못 모으고 또래들은 점점 연봉이 늘고 꿈이 커져가는데 나만 대학생 때 그대로 가난한 자취생의 삶을 사는 것 같아 불안이 곁을 떠날 날이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다니던 곳을 관두고 그래도 온전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래. 뭐든 돈이 있어야 할 수 있어. 제대로 된 월급을 받으면서 짬 내서 글을 쓰자.’


 나이가 많아서 날 뽑아줄 곳이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전에 바로 한 개인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잠깐이라도 쉴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나는 바로 채용되어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안정감이 필요했다. 그 안정감란 온전한 월급에서 오는 경제적 안정감이었다. 파트타이머로는 고물가시대에 먹고살기도 부족했다. 팍팍 쓸 정도로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다시 적금도 넉넉하게 하고 싶었다. 경력이 많고 길었던 내게 새로운 카페의 사장은 수습기간을 제시했다.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들어갔을 때나 해본 수습기간을 10년 경력의 바리스타인 내게 제시한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능력에 따라 3일 만에 수습이 끝나기도 하고 정 안 되는 경우 최대 3개월의 수습기간이 있다는 말에 ‘그래. 나 정도면 빠르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에 알겠다고 했다.


 이 카페는 7년이나 된 베이커리 카페였다. 손님 입장에선 빵과 커피가 정말 맛있는 좋은 카페였지만 직원에겐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카페였다. 사장은 30도가 다 돼가는 기온에도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고, 쓰레기장으로 이어지는 뒷문도 활짝 열었기에 늘 주방엔 파리를 포함한 각종 벌레들이 들끓었다. 매대에 있는 빵에 날벌레가 들끓으니 얼른 빵 포장을 하고 매대를 알코올로 소독해야 했다. (문을 닫으면 해결될 문제지만 사장은 이 계절은 어쩔 수 없는 벌레와의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주방에 에어컨을 틀어도 손님이 있는 홀에 문을 닫으면 안 됐다.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니 하긴 했지만 도저히 에너지 효율이 날 수 없는데, 사장은 늘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더운 오후 1,2시에 마감 청소를 해야 했는데, 바짝 마른 밀대로 락스 물을 바닥에 몇 방울씩 떨어뜨려가며 빡빡 문질러야 했다. 그렇게 해야 바닥이 잘 닦인다고 했다. (젖은 밀대로 밀면 청소하기도 쉽고 충분히 잘 닦인다.) 쫓아다니면서 어디에 자국이 있다고 하고 더 빡빡 문지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빗자루질은 매일 하지 않았다. 바닥은 빵가루와 먼지로 지저분했지만 사장의 이상한 신념으로 매일 청소하지 않았다.


 매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이 달랐고, 이렇게 하라 시키셔서 이렇게 했다고 하면 자기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자꾸 지켜보면서 지적을 하니 자꾸만 의심받는 기분이 들어 점점 더 열심히 할 의욕이 사라졌다. 납득이 가는 방식도 아니고 자꾸 부정당하다 보니 속상하고 우울했다. 수습기간을 빨리 끝내기 위해 매일 메모를 정리했고,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지적당하지 않기 위해 이 가게의 룰을 익혔지만 수습 기간은 계속 연장됐다. 그렇게 받은 첫 월급은 120만 원이었다. 물론 한 달을 온전히 일한 게 아니고 교육기간과 정식 근무 일수를 합쳐서 최저시급으로 받은 월급이었지만 여태 내가 한 고생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그래도 다음 달엔 수습이 끝나겠지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하다 또 수습기간이 늘어난 날, 도저히 더는 이곳에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못하겠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밀대질을 하다 보니 주방 밀대질만 40분을 했고, 현대판 콩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노동을 하니 손목 힘줄 부근에 염증이 심하게 생겨버렸다. 부목이 달린 보호대를 차고 남은 날을 근무했고, 손목이 다친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어서 똑같이 일했다.


 2024년에 이렇게 악덕한 사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내일까지만 근무하고 퇴사하라는 통보를 받았고, 어이는 없었지만 빠르게 탈출하게 해 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겨우 마지막 근무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자고 일어나니 업무 때문에 부재중전화가 와있었다. 이곳은 휴무날에도 업무 때문에 아침 일찍 전화질을 해서 깨우는 곳이다. 정말 하나도 좋은 점이 없었는데, 손님 입장에선 좋은 곳이라 평이 좋다는 게 참 억울했다. 얻은 건 유리멘탈과 부상 입은 손목, 퇴근하고 늦게 저녁을 먹어서 찐 살 1kg뿐이었다. 가난한 삶은 바뀐 게 없었고 글도 쓰지 못했다.


 두 달 만에야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고양이도 내가 집에 있어 몹시 기분이 좋은 눈치다. 내 무릎에 누워 쓰다듬어달라고 야-옹 한다. 사회생활도 잘하고 일도 잘한다고 자부하고 살아왔었는데,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 능력을 부정당하고 자유를 속박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이곳에서 나와보니 세상은 그 전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동안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기분이다. 원래의 나를 되찾을 시간이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인정과 보상, 자유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더 시너지를 얻어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규칙을 따르며 순응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라는 사람은 뭐든 납득 가는 이유가 있어야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려왔던 자유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최악의 환경에서 지내고야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은 나는 행복을 미루고 불안 속에 살던 사람이었단 것이다. 두 달 전의 나도 충분히 자유롭고 행복했음을 몰랐다. 앞으로의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느라 현재의 자유와 행복을 맘껏 누리고 감사하지 못했다. 서른세 살, 다시 백수가 되었지만 이제 더는 불안에 나를 가두는 행위는 멈추려고 한다. 지금에만 느낄 수 있는 아침 햇살의 따뜻한 여유, 다시 글을 쓸 수 있음에, 어디든 갈 수 있는 신체와 마음의 자유를 가졌음에 감사해야겠다.


 현재에 존재하는 나는 지금 온전히 자유롭고 행복하다. 이 사실을 매 순간 잊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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