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과 맞서다

by 크리스틴

4월 어느 날에 시간을 낼 수 있냐는 작은딸의 물음에 OK하고 때가 되어 제주도로 날아갔다. 커리어를 쌓는 중이지만 효도도 챙기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잔잔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방학에만 짐을 챙기던 나는 늘 비수기 여행을 꿈꾸었고 노랗게 핀 유채꽃 앞에서 사진 찍을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예상 밖의 날씨였다. 3다의 섬이라지만 4월에 태풍급 바람이 불거나 기상이 악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우리는 강풍과 만나버렸고 예약된 숙소는 생전 처음 가보는 글랜핑 숙소였다. 낮 시간에는 실내에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실내 스포츠를 하며 가끔 창밖으로 튀는 빗줄기를 쳐다보았다. 등에 흐르는 땀 줄기만큼 신나고 즐거웠다. 탁구, 배드민턴, 실내 골프, 실내 배구, 미니카 드라이브…를 두세 차례씩 하고 나서 글램핑장으로 향하려는데 빗줄기가 훨씬 굵어지고 바람의 세기도 세어져 있었다. 하나의 우산만 챙겨서 나왔던 우리들 중 한 사람은 우산을 쓸 수 없었고 그마저 바람에 뒤집히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뛰어가겠다고 했다.

“괜찮겠어요?”

라는 허무한 질문에

“이보다 더한 강풍도 맞으며 다 막아냈던 거 기억하죠?”

강풍과 폭우 속에서 앞서 뛰어가다가 휘청일까 봐 걱정했는데 더 심하게 쉬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우산 속에서 같이 뛰는 나와 딸이었다.


맞다. 그가 지나온 삶의 길목에 많은 강풍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첫번째 바람은 전기밥솥에서 시작되었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가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 세기말을 보냈는데 그는 가족보다 몇 달 먼저 가 자리를 잡으며 최대한 안정적 상황을 준비하여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온 ㄱ과 동병상련을 나누며 작은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서, 아마도 김치와 참치캔 정도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여러 날 지나지 않아 전기밥솥 아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바퀴벌레들을 보고 놀란 나머지 식욕을 잃고 말았다. 그 정도 가지고 밥맛을 잃는 못난이라고 할 분도 있겠으나, 나도 수긍하는 청결의 정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찍힌 그때의 사진을 보면 볼우물이 움푹 패인 것 같이 야윈 모습이다. 그 호텔에서는 냄새가 역겨운 이상한 담배 연기도 많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두 번째는 좀 더 위험한, 짧지만 강한 바람이었다. 바퀴벌레의 악몽 중에도 생존을 위한 적응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건강을 위해 ㄱ과 아침 산책을 하다가, 지리를 잘 모르는 채 접어든 막다른 골목에서 집채만한 등치의 세펴드와 대치하게 되었다. 으르렁거리는 개는 전혀 물러섬 없이 호랑이나 늑대처럼 이빨을 드러내었고 두 사람은 ‘최소한 중상’의 위기를 자각하였다. 치사하게 혼자 도망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던 그들을 위험에서 건져 준 건 세퍼드의 주인이었다. 나이가 많지 않은 러시아 여자였다고 한다.


세 번째의 크고 강한 바람은 내가 불게 하였다. 그의 노력과는 달리 두 아이와 함께 도착한 11월말에 거처할 집이 없었다.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에 경비가 겹겹이 세워진 외국인 전용 아파트에 들어갈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채 돌이 되지 않은 아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한 분이 다른 집과 합해 살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거주하고 있던 1층인 아파트를 내 주었다. 우리는 신축 아파트가 완공되기까지 거기에 살았다. (그분께 참 감사하다.)

집을 양보받았음에도 강풍을 불게 했던 나의 치명적 실수는 두 가지이다.

대리석이 아닌데도 바닥이 차가웠지만 실내화를 신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던 나는 맨발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샤프카(동물애호가들께는 죄송한 모피로 만든 여러 종류의 털모자)‘나 다른 모자라도 꼭 쓰고 다니는데 그것도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였다. 체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말에 긴 머리를 날리며 개똥이 쉽게 보이던 바닷가를 산책하고 집에 돌아와, 녹슨 상수도관을 통해 약하게 나오는 녹물로 샤워를 하였다. 그 뒤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가끔 가물가물 이제 막 벽을 잡고 걷기 시작한 둘째를 큰아이가 붙잡으며 따라가는 모습, 윗층에 살던 누가 직접 키워낸 콩나물로 국을 끓여 먹으라고 냄비째 들고 오던 모습 ……

일주일인지 열흘쯤 후에 갔던 차가운 병원에서 진료했던 의사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머리로 들어간 찬 바람과 발바닥으로 들어간 찬 바람이 심장을 향하고 있다. 심장에서 두 개의 냉기가 만나면 사망에 이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얼마간 전기장판에 누워서 민간에서 채취한 약초차를 마시며 나는 소생하였고, –40도의 찬 대륙에서 맞닿았던,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손가락을 꺾고 입술을 질겅거리던 그의 위기도 소멸되었다.


이외에도 VVO에서의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딜러권을 달라는 마피아에게 납치되었다가 본사와 협의하자며 겨우 풀려난 일, 처음엔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는, 구운 식빵을 식량으로 싸가지고 여러 차례 숲으로 출장 다녀온 일, 사무실이 있던 호텔 앞에서 노브이 루스끼(신흥 러시아 부유층을 일컫는 말)들의 결투와 확인 사살의 소식을 접하고도 다른 날과 다름 없이 출근하던 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하루하루 살아내었던 차가운 바람의 날들이었다. 그때의 위태로운 근무 환경은 상황마다의 신속한 결정과 행동을 윽박질렀고, 그의 선천적 민첩성과 만나서 휙휙 날아버리는 기운을 가지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함이 적극적 추진력이 될 때도 있기는 하다.


서울과 시드니와 다른 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오가며 그는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의 사람들을 만나왔다. 일보다 개인의 편안한 일상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과, 한국인 중에서도 급한 성격의 그는 자주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의 전쟁을 치룬다. 급변하는 정세나 상황 중에도 그는 늘 실적의 산과 인간관계의 골짜기를 넘어왔고 위기 상황을 지나왔으며 강풍과 맞서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집을 나서는 그에게 늘 당부한다.

“책임감을 가지고, 위험하지 않게 천천히 다니세요.”

웬만해선 찾아오지 않는다는 4월 제주의 태풍급 바람을 뚫고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그날 밤, 여독 탓인지 태평스럽게 코까지 골면서 잔 나와 달리 그와 아이는 밤새 펄럭이는 천막 지붕이 무너질까 봐 잠들 수 없었단다. 숙면을 취해 깨끗한 얼굴로 깨어난 나와 달리 둘은 피곤한 형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강풍에 맞서 막아주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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