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눈밭에 강아지: 순수에 대한 열정

by 크리스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낮 시간대 신간센을 타고, 에치코유자와로 향하는 중이었으나 그는 소설의 첫 문장을 열 번 넘게 중얼거렸다. 도쿄역에서 산 에키벤(도시락)을 먹으면서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창밖의 풍경을 보내면서도 같은 문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무대인 그곳은 오랫동안 풀지 않고 아껴둔 소원 여행지였다.

틈틈이

“눈이 많이 오는 때가 아니라니 큰 기대는 안 합니다. 온천 잘하면 돼죠, 뭐”

출발 전부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랜만에 부푸는 그의 눈동자는 눈의 고장을 고대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나이 탓인지 봄도 너무 이쁘고, 어떨 때는 겨울보다 여름이 지내기 낫다는 얘기를 그와 주고받지만, 오랫동안 내 계절의 선호 나침반은 겨울을 향해 있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공터가 있었는데 눈이 오면 모이라고 지르는 소리에 슬금슬금 기어나가 편을 나누어 눈싸움을 하였었지, 손이 얼었다 싶을 즈음엔 누군가의 집으로 모여

“곰 발바닥”

“양 발바닥”

“개 발바닥”

“말 발바닥”

을 외치는 발바닥 게임을 몇 판 하였다. 마루에 있던 연탄난로에 고구마를 구워먹고, 달고나를 하느라 국자를 태우고…… 누구 하나 우리집 간식 거덜 낸다고 따지는 아이도 없었고 어른도 없었다. 모두가 따스한 순수의 날들이었다.

남편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중국 무술 영화로 채워졌다고 하는데, 여직 삼국지와 손자병법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나는 그 깊은 무협의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단지

“눈이 오는 창가에서 벽난로를 피우고 따뜻한 풍경 속에 살고 싶다.” 든지

“주일이면 ‘초원의 빛(미드)’ 주인공들처럼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러 교회에 가고 싶다.”


는 그의 꿈이,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단순하게 살기로 결심한 나와 닿아 있었다. 순수의 시절이었다.


이전에도 겨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주었다. 같이 걷는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실버벨’이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무한 감동하였고,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세웠던 눈사람들의 수효만큼이나 기쁨의 크기도 컸었지. 영화 러브 스토리의 장면을 흉내 내어 많이 쌓인 눈 위에 철퍽 누워도 보고, VVO(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닥터 지바고처럼 속눈썹 위에 내려 앉던 눈송이들…… 내 눈썹에도 눈이 내려와 앉을 수 있단 사실이 그냥 신나고 좋았었다. 순수의 시절이었다.


사실 그는 순수함을 추구하며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타입인데, 나 또한 그러하여서 쿵짝을 대체로 잘 맞추는 편이다. 하지만 아시듯이, 세상은 그렇게 두지 않는다. 남들보다 아주 늦게서야, 어설프게 습득한 각자의 영악함을 내세우려다 사소한 갈등으로 미간을 찌푸리거나 찔끔 눈물을 보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기본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곤 한다. 재리에 밝은 누군가 우리들의 서사를 본다면 멍청하거나 모자라다고 비웃을 것이다.


마침내 에치코 유자와!

“아~~!!” 탄성이 저절로 나 왔다. 곳곳의 시간 길목에서 작은 중얼거림의 기도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기온이 아님에도 역에 다다른 모두의 얼굴을 기쁨으로 물들이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그는 이내 감격시대에 빠져들었다.

- 도착한 에치코 유자와 역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

가지고 가지 않은 스키 대신 주로 아이들이 타는 눈썰매로 언덕을 10번 오르내리면서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유자와 온센 로프웨이 정상에서도 특별한 것 하지 않고 커피 마시기가 전부였으나 평온한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돌아오는 날 새벽부터 아낌없이 내려 쌓이고 쌓이던 하얗고 하얀 눈은 그를 극도의 흥분상태로 몰아넣었다. 스스로도 객실과 건물 밖을 쉬지 않고 왔다갔다 하면서 ‘극도의 흥분상태‘라고 고백하였다. 눈밭에 강아지처럼 밤이든 낮이든 하얗게 물들일 길 위를 뛰어다녔다. 도시에서 그랬다면 넘어져 다칠까 봐 걱정을 사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아침 식사 시간 창밖에서도 나뭇가지마다 눈이 쌓여 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리며 은가루를 쉬지 않고 뿌려주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밖의 경치를 눈에 담고 있었다. 어린아이로 다시 돌아간 순수의 시간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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