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 하늘을 보니 구름이 듬성듬성 달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시침이 이제 막 열시를 지나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늦었다는 생각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밤이라는 시간에 참 많이 무뎌졌다는 생각이 들어 로비를 나오며 나도 모르게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적막한 새벽에 일찍 눈이 뜨여, 전동 면도기 소리는 왠지 거슬릴 것 같아 오랜만에 쉐이빙 크림을 잔뜩 바르고 수동 면도기를 집어들어 슥슥 수염을 밀었다. 서걱서걱 거침없이 수염이 잘리는 느낌이 유난히 시원하다고 느껴졌지만, 마지막에 차가운 물로 깨뜻하게 씻어내고 나니 뭔가 허전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딱 하루 분량 만큼의 수염이 잘려나갔다. 지난 아침부터 오늘 새벽까지. 군 생활 이후로는 써본 적 없는 수동면도기였지만 오랜만에 사용해도 그 느낌은 익숙한 그대로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하늘이 어느새 조금씩 푸르스름한 색깔이 되어, 이쯤 되니 다시 잠들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침대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깔끔하게 포기하고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블랙 믹스 커피 스틱 두 개를 뜯었다. 본격적인 여름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며 창 밖을 보니 가로등이 하나 둘 씩 꺼지고 있었다. 무심코 블루투스 스피커에 휴대폰을 연결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제 듣던 즉흥환상곡이 중간 부분──, 중저음의 묵직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제 저녁에 어느 부분까지 듣다가 잠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건 비단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긴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같은 속도로 흐르는 시간에, 잠깐 멈춘듯한 기분이 드는 잠들기 직전의 순간도 시간은 어김없이 착실하게 흐르고 있다. 순식간에 아침이 되어──,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꾸역꾸역 출근을 하고, 차가운 얼음을 가득 담은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다이어리에 이것저것 오늘 해야할 일을 적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휘몰아치는 일의 소용돌이 중앙에서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이미 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퇴근길에는 대체로 회사에서 있었던 그날 그날의 일을 회상한다. 어쩌면 바쁜듯 보여도 실은 시간 활용이 서툴 뿐인게 아닐까, 혹은 적극적이었던 것 같지만 사실 단순히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기 위한 발버둥을 들키기 싫었던 건 아닐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흘러버린 하루에서 깨어나는 건 언제나 달이 떠 있을 무렵이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조금씩 소진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건 이미 오래 전에 눈치챈 일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돌아보면 그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 오래전, 그러니까 학생 시절에도, 그 이전의 유년기에도 나름대로의 '무언가'는 소진하며 차근차근 성장해왔다.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이야기할만한 것도 아니지만──, 비록 생각보다 더딜지라도 지금의 성장 동력을 얻기 위한 필연적인 소진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씩 초조해했던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내면의 알 수 없는 그것도 분명 무한하지 않을 텐데 전부 소진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내면에 대체할 수 있는 건 무엇이 남아 있긴 할까, 에 대한 것이었고, 이건 꽤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되뇌이던 문제였다. 대체 에너지에 대한 개념은 이미 오래전에 과학 과목에서도, 사회 과목에도 몇 번이고 배웠을 텐데, 그게 비단 에너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걸 어째서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걸까.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가 '만성적 불만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아──,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여러 지인들의 핀잔이 곧바로 집중 포화가 되어 이어졌지만 글쎄──. 오히려 그런 만족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걸 지체시키기만 하는 건 아닐까. 주변을 둘러 보며 작은 것에 만족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는 시점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것에도 만족하려고 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사소한 것에만 만족하게 되버렸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퇴근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깨어난 게 맞는지 여전히 확신은 없는 그대로다. 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