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아 Sep 15. 2023

B 시에서의 둘째 날, 초대받지 않은 손님 같은 기분

 나는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미혼일 땐 직장 일로 바빴고, 결혼한 뒤에는 육아에 정신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혼자 여행을 가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를 혼자의 여행을 꿈꾼 건,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코로나19가 창궐하고 활동 반경이 좁아지다 보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가 급격히 올라온 것도 있다.


 무언갈 하고자 하는 바람은 나이와 무관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마음도 잦아든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올해 들어 부쩍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 하는 말. 그 말뜻에 담긴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고 있다.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 체력이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떠나고 싶은 마음과 체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혼자 여행을 가고프다.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여기서 한두 해가 더 지나면 날 위한 혼자만의 여행도 체력과 함께 멀어질 것만 같다.


 남편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도 아마 나처럼 혼자의 여행을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가정을 함께 떠받치고 있는 남편에게 두 아이의 육아를 부탁하고 여행을 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여행을 이야기하면 흔쾌히 다녀오라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함께 나누어도 힘이 드는데, 남편에게만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이번 B 시에서의 일러스트 페어 기간에 부지런해지기로 했다. 일을 핑계 삼아 짬을 내서 틈새 여행을 해볼 작정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B 시의 벡스코 전경


 첫째 날은 장거리 운전으로 피로도가 높았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책을 붙잡자마자 몇 줄 읽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책을 조금이라도 더 읽기 위해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추어 놓았다. 페어에 참여하는 특별한 날에는 독서를 건너뛰어도 괜찮을 텐데. 나는 글쓰기와 독서에 강박증이 있는 듯하다. 요즘은 매일 3시간씩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욕망이 자꾸만 꿈틀거린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량을 채우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래서인지 새벽 3시 30분에 눈이 저절로 떠진 것 같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눈곱이 붙어 있는 채로 책을 펼쳤다. 5시까지 책을 읽고 나갈 채비를 했다. 지하철 첫차 시간에 맞춰 새벽바람을 맞으며 해운대로 갔다. 숙소 위치가 너무나도 좋아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이면 해운대에 닿을 수 있다. 출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본 게 얼마 만일까. 20년이 다 되어간다. 밥벌이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표정, 차림새, 지하철 내부의 공기마저도 모든 게 새로웠다.


 동이 막 트기 시작한 금요일의 새벽녘, 해운대의 풍경은 의외였다.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운동복을 차림으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 신발을 들고 맨발로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 비둘기에게 과자나 빵조각을 주는 사람, 밀려오는 파도를 감상하는 사람, 바닷소리를 자장가 삼아 하룻밤을 지새운 사람 등. 북적거릴 만큼은 아니었어도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나도 모래사장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좋은 일이었다니. 모래가 신발과 옷 속을 파고들어도 상관없었다. 바다에 마음을 빼앗겨 넋을 놓고 있는데, 곧 동이 떠올랐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를 둘러싼 모든 곳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오늘을 살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 마음을 안고 행사장으로 갔다.


날 해운대로 데려다 줄 지하철을 기다리며,  넓고 깊은 바다를 사진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해운대에서의 일출.


 페어가 오픈하기 전이었는데 어제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오늘은 사람들이 입구에 줄지어 있었다. 10시가 되자 사람들이 어딘가로 우르르 달려갔다. 페어를 빨리 보려고 달려서 입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도 10시가 되자 사람들이 동시에 어디론가 달려갔다. 셋째 날이 되어서야 옆 부스의 대표님에게 말했다. “어디에서 이벤트를 하나 봐요?”, 하고. 대표님은, 유명한 일러스트 작가님이 계실지도 모른다고 했다. 달려가는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해 내일은 그들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입장하는 줄이 길어서 오늘은 사람이 좀 많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늘의 페어를 마감할 시간이 거의 다 되자, 바닷가에서의 감사한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간절함이 자리했다. 페어 둘째 날인데도 어제보다 부스를 방문해 주신 분들이 훨씬 적어서였다. 책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일러스트만 보지 말고 책이 놓인 부스들도 둘러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책을 지나쳐 일러스트 부스로 가려는 분들을 붙잡고 “제가 쓴 책이에요. 편하게 보고 가세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 지치면 잠시 입을 다물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페어 셋째 날을 보내고 나서야, 나의 헛됨을 알아차렸다. 첫째 날 적자는 면할 수 있겠다는 그 말은 거품 같은 허황이었다. 부스 대여비, 4박 5일간 지낼 숙소비, 식대, 주유비를 어림잡아 봐도 50만 원이 넘는다. 마지막 날 하루 만에 책 20권이 팔릴 리 만무하다. 50만 원에서 삼분의 이가 적자다. 처음 일러스트 페어를 신청할 때만 해도 잘해서 기부할 비용 이상을 갖고 돌아갈 거라고 마음먹었는데….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기부가 더 멀어진 것만 같아 슬프다. 나는 이러한 슬픔을 잘 알고 있다. 슬픔에 잠겨 주저앉아 버린 채 울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인생은, 어른의 삶에는 운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혹독하게 가르쳐주었다.      


 해운대의 바닷소리와 내음이 가슴에서 밀려 나왔다. 바다가 나의 슬픔을 감싸 안으며 말해 주는 듯했다. “괜찮아.”, 하고.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는 언제나 늘 다정하게, 나를 다독인다. 바다는 나보다 훨씬 성숙하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오늘은 슬프지만, 웃는 날도 있겠지. 그러니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고개 숙인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슬픔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아직도 나이 먹은 무늬만 어른인 것 같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지혜로운 방법인지 잘은 모르지만, 어른 흉내라도 내야겠다. 그래야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 테니까. 적자를 만회할 계획을 세우자! 또다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란 없다. 우선, 페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참! 입장과 동시에 어디론가 떼 지어 달리기를 한 사람들은 일러스트 럭키박스를 사려고 줄을 섰다.  럭키박스는 15,000원인데 그 안의 구성이 알차다고 한다. 한정수량으로 선착순 판매라 달리기를 한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B시에서의 일러스트 페어 in 스토리 기획전 첫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