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공감

by 이수아

팔 년 지기 친구가 작별을 고했다. 첫째와 둘째를 함께 키우며 육아 고통을 나누던 우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언니다. 마음을 잘 헤아려주던 H 언니는, 나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다. 팔 년 동안 알아 오며 자주 연락하고 만났다.

코로나19가 발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H 언니와 연락이 안 되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몹시 걱정되었다. 줄기차게 연락한 끝에 H 언니와 연락이 닿았고,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확진되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코로나에 확진되어도 주위의 시선이 따갑지 않지만, 코로나 발병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H 언니는 음압병실에 있다가 생활치료센터로 옮겨졌다. 3달 뒤 퇴원 후 만났다. 곱도리탕에 소주를 마시고 2차로 선술집에서 맥주도 마셨다. 맥주값과 택시비를 서로 내겠다고 티격태격했지만, 이야기보따리를 한껏 풀어놓으며 많이 웃었다. 그런데 나만 즐거웠던 듯하다.


며칠 후 H 언니는 서운하다고 했다. 울적한 마음을 위로받고 힘든 나날을 공감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3달을 병실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헤아려주지 못해 미안했다. 사과를 늦게 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빨리 사과했다. 그럼에도 H 언니는 말로 날 아프게 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헤아려주기 위해 긴긴 말을 덧붙였지만,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시간이 좀 흘러 만나자고 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이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H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는 원래 공감 능력이 부족하잖아. 나르시시스트는 공감력이 떨어진대.”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도, 나르시시즘 하다는 것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아이가 속상해할 때면, “우리 00가 속상하구나. 선생님이어도 속상했을 거야.” 하는 말로 마음을 읽어 주었던 나였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같은 처치와 입장인 사람은 서로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이다. 회사 내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동료이고, 주부의 힘듦은 주부가 잘 아는 것 말이다. 나도 얼마 전에 코로나 확진을 받았지만, H 언니가 확진되었을 당시엔 다른 입장이었다. 그래서 위로와 공감을 잘 못 해주지 않았나 싶다. 나름의 위로를 건넸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감각하지 못하면 어찌할 수 없다.




공감이란 무엇일까, 그저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공감일까. 한때는 경청과 묵언의 제스처가 공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만큼 해 줄 수 있는 게 공감이라고 여긴다. 완벽하게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해 준다는 건 어쩌면 불가할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과 경험을 온전히 감각하지 못하기에 그렇다. 특히, 감정은 상대방의 것이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많이 알아야 하고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직접 경험이 좋지만 그럴 수 없을 땐 간접경험을 하면 된다. 책, 드라마, 영화, 뮤지컬, 노래 감상은 간접경험을 하게 해 준다. 그리고 에너지를 들여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대방의 입장이 나라면 어땠을지, 입장 바꿔 생각하면 된다.




서른 후반이 되어도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다. 인터넷에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라고 해도 모르는 세계가 너무나 많다. 꾸준한 독서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H 언니가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싶다. 기대고 싶어 할 때 공감을 잘해서 아픈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기를 스스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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