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사이 투명 해지고 있었다

by 이수아

대학 2학년부터 졸업하기 전까지 야간대학을 다녔다. 주간엔 대학 부속유치원에서 부담임으로 일했다. 나에게 부여된 부담임이라는 명칭은 사명감을 안겨 주었다. 주간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느라 몸은 고단했지만,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열과 성을 다했다. 어머니들의 인정으로 풍만한 생활이었다.


졸업 후 자연스럽게 모교의 대학 부속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어머니들을 보고 느낀 건 부러움이었다. 주 5일 오전 8시 30분, 어제의 피곤이 풀리지 않아 하품을 연신 해대는 나와는 달리 어머니들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 찼다.


특히, 월요일에 유독 표정이 밝았다. 유치원 등원 차량 지도 시 나의 시선에 보인 어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었다. 나와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낳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사는 삶이 행복해 보였다. 결혼생활이란 어떤 걸까, 종종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안정과 행복이 보장된 삶의 갈망은, 당시에 만나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결심하게 했다. 삶은 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대로 우리는 이별했다.




이 년이 지나고 서울 소재의 유치원으로 이직하고 나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만난 지 삼 개월이 되던 어느 날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하기에 조건이 맞았다. 양쪽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반기셨다. 남편이 아니면 못 살 것 같다는 마음보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이해했다.

스물여덟이 되던 해 결혼해 아이를 가졌다. 꿈꾸던 안정된 삶이 실현되었다. 행복하게 살 나날의 연속일 것만 같았다. 2012년 6월 26일 첫 아이를 낳았다. 반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유치원을 퇴사했다. 출산과 함께 전업주부가 되었다. 육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밤과 낮을 가르지 않고 이어진 수유로 가슴은 늘 얼얼했다. 아기가 세 살이 되기 전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하도 울어대는 통에 화장실 한 번을 갈 때도 문을 열고 용변을 봐야 했다. 그렇게 울다가도 방긋 웃는 아가의 해맑은 얼굴은 모성애를 자라게 했다. 육아로 보낸 삼 년 동안 스스로 사람이라기보다 동물인 것 같이 느껴지던 날이 많았다.


육아가 고통스러울 때면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 희망은 헛된 단비와 같았다. 세 돌을 맞이하는 해에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아이는 적응하지 못했다. 보통 2개월이 지나면 적응을 한다는데, 3달 이 지나도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아마, 동생이 태어나서 엄마를 더 찾았던 듯하다. 말로만 듣던 엄마 껌딱지가 된 것이었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아이가 엄마와 떨어졌을 때 분리불안이 심하니 가정 보육을 조금 더 하기를 권하셨다. 또래 아이들은 3, 4살에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하는데, 나는 다섯 살에 유치원을 보냈다. 유치원을 다니기 싫다기에 이마저도 그만두었다. 엄마와 같이 있고 싶다고 우는 아이의 등을 떠밀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 손을 못 타고 자란 이유도 있다. 아이가 스스로 유치원에 가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게 엄마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 아이에게 내가 평생 갖고 살아갈 만큼 서러운 기억은 주지 말아야 해.'


또래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며 유치원에 갈 때, 나는 두 아이와 집에서 육아 전쟁을 치렀다. 주위 엄마들은 커피 한잔 마시러 카페에 나오지 못하는 날 안타까워했다. 그럴 때면 어쩐지 좀 서러웠다. 그 서러움을 육아에 몽땅 집어넣어 아이들과 함께 지독하게 놀았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겠다고 한 건 7살 때였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자유를 만끽하는 엄마의 모습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천적 (외) 사시로 태어난 둘째는 혼자 밥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도 협응이 잘되지 않았다. 밥상 앞에서 스스로 음식을 가져다 먹지 못했다. 둘째는 밥 먹을 때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짜증 내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사시 치료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눈을 가려주어야 했다. 2주에 한 번씩 두 아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내원하고 나면 진이 빠졌다.


둘째가 5살이 되던 해 오랜 치료 끝에 사시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시력을 회복한 뒤에야 유치원에 보낼 수 있었다. 결혼 전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보았던 밝은 엄마의 얼굴을 하고 다녔던 시절이었다.




밝은 얼굴을 할 수 있게 돼서야 알게 된 게 있다. 결혼 전에는 결혼생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동경했다는 것, 안정된 울타리를 꾸리려면 공을 들여야 하다는 것을 말이다. 유치원 교사를 하며 보았던 어머니들의 밝음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어린 아가를 키우는 엄마의 삶은 말과 글로는 담아낼 수 없다. 아이를 낳고 삼 년이 지나기까지 고단하고 힘겨운 시간의 연속을 어떠한 문장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죽음의 삼 년’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면부족, 밥 한 끼, 용변 보는 일과 씻는 것조차 뭐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출산을 한다는 건 육아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름을 갖는 날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는 순간 엄마가 되고 새 이름을 얻게 된다. '00 엄마'라는 이름. 몇 년을 '00 엄마'라고 불리다 가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듣게 되는 날엔 그렇게 내 이름이 낯설 수가 없다. 엄마로 아내로 사느라 나 자신이 잊히는지조차도 모르게 가쁘게 살아내던 시간.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만 하는 생존게임 같았던 날들이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보았던 어머니들의 밝은 얼굴에 가려진 어둠을 이제는 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지 나로 살 수 없는 어머니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 놓아야지만 내가 될 수 있는 것이 이다. 그러니 얼굴이 밝을 수밖에...



첫째와 둘째가 아가 티를 벗고 어린이가 된 지금은 전보다 얼굴빛이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와 아내로 살며 종종걸음을 한다. 학교와 학원 보내기, 준비물 챙기기, 숙제 봐주기, 아이 마음 들어주기, 밥 차리기, 빨래, 설거지, 청소 등 할 일이 많다. 남편이 도와주려고 애쓰지만,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서 내 품이 많이 든다.


매일 나의 하루 중 3의 2에 해당하는 시간이 아이들에게 들어간다. 아이가 어릴 땐 육체적으로 힘들었는데, 크면 클수록 정신적으로 힘들다. 육아가 힘겨울 때면 이기주 작가님의 책 제목을 생각한다. 이기주 작가님의 책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제목처럼 아이들은 엄마의 시간을 먹고 자라난다고, 그러니 아이들에게 엄마의 시간은 곧 사랑이라고 되뇐다. 지친 나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치진 마음에 위안을 주는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이다.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던 날 글쓰기를 만났다. 엄마, 아내의 역할을 해내느라 정신없이 지내다가도 혼자가 되면 내 이름을 떠올린다. 서른여덟의 나를 잊어버리기 싫어서 지금처럼 한 편의 글을 쓴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지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내 존재를 감각하려는 애씀이 여기에 있다.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백지 위에 무언갈 써 내려갈 때면 마법이 일어난다. 글쓰기는 투명해진 나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이다. 글을 쓸 때면 나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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