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제비꽃의 교집합

언니

by 이수아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어머니가 서울 가게에 가고 할머니도 밭에 가고 나면 언니와 나는 뒷산에 자주 올랐다. 뒷산으로 가는 길은 시멘트 바닥으로 양쪽에 밭이 있다. 봄이면 길과 밭 사이 가장자리에는 제비꽃이 옹기종기 피어있었다. 언니는 제비꽃을 발견하고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제비꽃이다. 수아야, 이리로 와봐”


언니가 부르면 냉큼 옆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았다.


“수아야, 손 펴봐.”


언니는 제비꽃을 꺾어 나의 두 손 위에 살포시 올려주었다. 작은 손바닥이어도 제비꽃은 폭 안겼다.


“제비꽃이 좋아. 제비꽃은 찐한 보라색이라서 예뻐."


우리는 두 손 가득 제비꽃을 따서 집으로 가져왔다. 마당 수돗가에서 돌멩이를 물에 씻어 제비꽃잎을 짓이기며 놀았다. 나뭇잎을 접시 삼아 제비꽃을 담아 놓았는데 제비꽃잎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나는 바람결에 날아가는 제비꽃잎을 잡으려고 쫓다가 언니와 눈이 마주치고는 꺄르륵 웃고 말았다.




언니가 중학교 1학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언니의 낯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언니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너 ‘은따’라고 알아? 내가 우리 반에서 내가 그런 것 같아.”


‘은따’는 은근한 따돌림의 준말이다. ‘왕따’의 전 단계를 암시하는 불쾌한 단어이기도 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언니가 왜 소외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언니를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언니를 위로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언니가 책상에 앉아 공부하면 나도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책상 앞에 앉았다. 언니가 티브이 앞으로 가면 나도 언니 옆에서 티브이를 보았다. 그러다 언니가 깔깔거리고 웃으면 어디가 웃긴 포인트인지 모르면서 언니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언니가 어느 날 말했다.


“엄마 아빠 힘들게 돈 벌고 있잖아. 나 지금부터 매일 공부할 거야. 공부 잘할 거야. 수아, 너도 공부해.”


그 뒤로 언니는 책상 앞에 앉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언니의 등수는 상위권이었다. 중학교 때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전교 50등 안에 들었다. 고등학생이던 언니는 성적이 안 나와서 눈물 바람을 하기도 했다. 울다가 눈물을 닦고 일어서더니 책상 앞으로 가 교과서를 펼쳤다. 나는 다이어리에 쓸 것도 없으면서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에 다이어리를 들고 공부하는 언니 옆에 앉았다.


언니는 부모님 권유로 대학 간판보다는 과를 우선순위에 두고 유아교육과로는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했다.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대학을 졸업했다. 언니는 대학 때 했던 현장실습에서 사립유치원의 현실을 보았다고 했다. 실습을 마친 뒤 어느 날 언니가 말했다.


“내 가치를 인정받고 교육철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공립유치원밖에 길이 없어.”


언니는 이 말을 하고 난 뒤부터 인터넷 강의와 학과 공부를 병행했다. 유아 임용고시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졸업을 하던 해에 첫 번째 유아 임용고시에 낙방했다. 그 뒤로 3년을 노량진 고시원에서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모교 대학 부속유치원의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전공이 같아서 어떤 해에는 언니를 따라 노량진 입시학원에서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 약 200명가량 수용이 가능한 큰 강의실에는 의자와 책상이 빼곡했고 천장 곳곳에는 스크린이 달려 있었다. 맨 뒤에서 바라보면 강사의 모습이 작게 보이고 칠판의 글자는 보이지 않아서 스크린이 있어야만 했다. 강사 코앞에 놓인 12개의 의자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언니 저기에 있는 책상은 간격이 좀 여유로운데?”


“저기는 SS 등급만 앉을 수 있어. 모의고사에서 1등부터 12등까지 SS 등급이야.”


그해 언니는 서울로 지원했고 약 200:1의 경쟁률을 뚫지 못했다. 두 번째 낙방이었다. 언니는 시험을 치르기 몇 달 전부터 구토 증상을 보이고 다리 경련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다. 언니가 임용고시를 준비한 지 3년이 되던 해는 특별했다. 드디어 노량진 입시학원에서 SS 등급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경쟁률이 서울보다 약한 경기도로 지원할 계획이어서 이번엔 붙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약 100:1의 경쟁률을 뚫지 못하고 세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다.




4번째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언니가 있는 노량진으로 갔다.


“언니, 나는 돈 벌잖아. 오늘은 내가 밥이랑 커피 살게.”


“힘들게 번 돈을 왜 이런 데다 써? 나 돈 있어.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


언니는 입시학원이 즐비한 노량진 사거리에 줄지어 있는 포장마차에서 천오백짜리 컵밥을 샀다. 양이 푸짐했다. 나는 한 번씩 선생님들과 회식하는데, 3년간 주로 컵밥을 먹었을 언니를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했다.


“언니 정말 맛있어. 언니가 사준 거라서 더 맛있어.”


나는 컵밥에 든 밥 알갱이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워냈다. 그리고 언니는 칠백 원 하는 아이스 카페모카를 사주었다. 커피 한잔을 두고 마주 앉아 바라본 언니의 얼굴은 비장해 보였다.


“올해 목숨 걸고 했어. 이번에 떨어지면 너처럼 사립유치원으로 가려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언니가 사준 아이스 카페모카 위에 있는 크림을 빨대로 휘저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만큼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이 정도 했으면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내 삼켰다.


언니는 임용고시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78:1을 뚫고 경기도권 유아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합격한 날 언니는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올해로 십이 년째 그때 했던 말처럼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언니는 학부모에게 쓴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아이를 위해 꼭 해야 할 말은 참지 않는다. ADHD나 정서불안과 행동 장애를 보이는 아이의 어머니 중에는 아이를 감싸주기만을 바라는 어머니가 적지 않다. 그러나 언니는 아이를 이유 없이 싸고돌지 않는다.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서툴러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기다려준다.


아이가 ‘못하겠다며 선생님이 대신해 달라’며 울고 불면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어느 정도 아이가 혼자 힘으로 해내면 손을 보태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어준다. 수업 중 돌발행동을 하는 아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다른 아이들이 놀라지 않았을지 세심히 살피기도 한다.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색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언니가, 제 몸을 곧게 세우고 있는 보라색 제비꽃을 닮은 듯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머니를 많이 찾았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할머니가 있었고, 할머니의 빈자리에는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내게 다정한 친구이자 어머니 생각으로 그늘진 마음의 햇살이었다. 기억 속에 있는 언니의 모습과 내 마음속에 있는 언니의 따스함도 짙게 남았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면서 가끔 일탈한다. 친정에 아이를 재워놓고 늦은 밤 언니와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좋아해 서점 나들이를 즐기며 책 수다를 떨기도 한다. 커피숍에서 몇 시간을 말없이 각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언니와 나는 이렇게 우리만의 교집합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어릴 때 언니가 좋아했던 제비꽃의 짙은 보라색처럼 앞으로 우리의 교집합도 더욱 짙어지지 않을까.


나에게 언니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함께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출근길에 오르고 있을 언니에게 언젠가 메시지로 노래 한 곡을 보냈다. 그 노래는 김사월의 ‘누군가에게’이다. 이 노래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


사실 언니와는 어릴 때부터 자주 다투었다. 다정한 날보다 무심했던 날이 더 많았다. 우리 사이에 미움이 자리했을 땐 남보다 못한 사이이기도 했다. 한 부모 아래 태어난 우리는 어떠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서 만난 걸까.




우리는 외모부터 성격 그리고 성향까지 어딘가 다른 듯 닮아있다. 어머니의 빈자리 함께 느끼고, 불편한 시골집에서 깨끗하지 못한 옷을 입고 꾀죄죄한 얼굴로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아픔을 나누어지고 자란 언니와 나다. 어린 마음에 한 살 터울인데 내가 언니가 돼서 더 많은 걸 차지하겠다고 바락바락 많이도 대들었다.


세월이란 속절없이 흘러가는 듯하지만, 알지 못하는 걸 일깨워 주기도 한다. 언니가 없었더라면 나는 더 슬픔과 아픔을 지고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한 살 차이지만 맏이로 태어나 감당해야 했을 부담과 무게는 엄연히 다르다. 귀한 인연으로 맺어 진지도 모르고 산 세월을 돌이킬 수 없으니, 남은 삶에 어둠이 드리우더라도 언니가 나를 보듬어주었듯 나도 언니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나를 닮은 언니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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