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불꽃
-우리은행동우회 천안 문화답사
최원돈
3월은 보국의 달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제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우리 민족의 가장 자랑스러운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올해 동우회 첫 문화답사는 천안이다. 7시 반 효자동을 출발해 남산 터널을 지나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를 들어서자 찌푸린 하늘은 밝아졌다. 걸쭉한 입담으로 임 해설사는 오늘 일정을 설명해 준다. 버스는 어느새 망향 휴게소에 들러 사당에서 출발한 버스 3대와 함께 천안으로 향했다.
3•1 운동은 단순한 조국 독립을 선언한 날이 아니었다. 적국인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이 선언한 기미년 2•28 조선 독립의 선언이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 유학생 송계백은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와 중앙고보 송진우 스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송진우 선생은 손병희 등에게 알려 민족대표를 결성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원래 탑골공원에서 선언하기로 하였으나 운집한 학생들이 흥분해 비폭력 선언이 자칫 잘못될까 우려해 부득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는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이곳에 모인 학생 천여 명의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하늘에서 꽃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날 이화학당 유관순은 학생단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이화학당에 총독부의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병천 아우내 장터를 지나 유관순 기념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120여 명의 회원들을 모아놓고 해설사는 천안 주변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주며 이곳이 예사로운 땅이 아님을 알려준다. 매봉산 아래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이 들어선 이유와 이곳이 유관순 사당과 초혼묘가 있는 우리 민족의 성지임을 주지 시킨다.
유관순 기념관은 조용하고 숭고한 분위기가 감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열사의 넋을 기린다.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에 태극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열사의 초상화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린다.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이 주선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매봉교회의 속장(屬長) 조인원과 지역 유지 이백한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경성의 만세운동을 설명했다.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안성. 목천. 연기 등의 마을 유지들을 규합하고 주민들을 상대로 만세시위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의 선도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유관순은 선두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 곧 공주 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져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하고 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의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주장했다.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은 재판 펀결문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재판에서는 격렬한 공방이 오갔으며, 유관순은 재판 과정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당 법정에서 피고 유관순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헌병이 와서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사망 19명, 부상자 30명이 발생했다. 자신의 아버지도 그때 찔려 살해되었다.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눌 때 유관순은 쌍방을 제지하기 위해 헌병의 총에 달려들었다."
피고 유관순은 만세를 부른 아버지의 사체를 보고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라고 말하고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지 않으려고 갑자기 그 가슴에 매달렸다."
- 경성복심법원 재판장 총원우태랑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에도 감옥 안에서 굴복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불러 고문을 당했으며 출소를 하루 남기고 옥사하였다. 이 사실은 들불처럼 퍼져 1년 동안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유관순기념관에는 손 글씨 한 점이 눈길을 끈다. 해방 2년 후 1947년 11월 27일 아우내장터에 독립만세 기념비 제막식에서 이화여중 대표 이연옥의 추념사이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내려 간 추념사가 처연하다.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 독립투사들의 선봉이 되어서,
오오, 그 전날 밤 매봉에 드시던 횃불!
그것은 유관순 언니의 뼈에 조선 사람의 기름을 찍어 켜든 민족해방의 봉화이었습니다. 그 불이 이 겨레의 마음속에 밝게 비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가져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 산이 매봉산입니다. 유관순이 4월 1일 전날 저 산에 올라 횃불을 들었습니다. 주변 마을에 내일 거사에 이상이 없다는 신호였습니다. 주변 마을에서도 거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횃불이 솟아올랐습니다.”
유관순은 마침내 겨레의 불꽃이 되었다.
유관순 생가는 지평리 넓은 들 자락 용두리 아래 있다. 매봉 아래 길게 펼쳐진 용두봉 아래 기역자 초가로 옆 생가가 있다. 그 옆에 매봉교회가 아담하게 서 있고, 생가 앞에는 유관순의 동생 유인석이 말년에 살았던 기와집이 있다. 교회는 이화학당에서 새로 지은 건물이고 동생이 살았던 기와집은 이 고장에서 유족에게 지어주 살게 한 집이란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유관순의 가족이야기입니다. 유관순을 알려면 가족을 알아야 합니다. 유관순이라는 인물에 대한 배경은 가족입니다.”
동우회 회원들은 마당에 죽 둘러앉아 유관순 가족의 수난사를 듣는다.
유관순의 가족은 교회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집안 전체가 기독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유윤기는 이곳 지령리 교회 첫 번째 교인이었다. 그의 아들이 유중권이고 손녀가 유관순이다. 이때 유윤기는 노환중이었다.
아우내 만세운동에 나간 아들이 헌병의 총칼에 찔려 빈사상태가 되어 업혀서 집에 왔다.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리고 손녀는 일본 헌병을 피해 도망 다니고 손자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졸지에 남은 두 동생은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유관순이 투옥되고 두 달 후 유관순의 할아버지는 별세를 했다. 육촌 할아버지인 유민기는 매봉교회를 설립한 분으로 공주읍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풀려 나 1920년 유관순 순국하고 안치되었던 시신을 찾아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 흥명학교에 다녔는데 공주 만세운동에 참가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유관순이 재판정에 들어가는 날 오빠 유윤기는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만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다.
천애의 고아가 된 두 동생은 형아를 찾아 공주까지 걸어서 갔다. 천안에서 공주까지 어린아이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공주에 도착했자만 형은 감옥애 있어 갈 곳이 없었다. 마침 이곳 조화벽 처녀교사를 만나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조화벽은개성에서 만세운동으로 공주에 피해와 있었다. 오빠 유윤기가 석방 돠자 조화벽과 결혼해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유인석은 형수의 돌봄으로 살아남았다. 말년에는 생가 앞에 기와집에서 살았다. 후손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손녀의 회고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평생을 누나인 유관순이 두 동생이 걱정되어 집에 들렀다가 일본헌병에게 잡혀갔다며 애통해했어요."라고 했다.
생가 안방에는 어머니 이소제,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이 모여 만세운동을 논의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건넌방에는 동생 유인석과 사촌언니 유예도, 유관순, 막냇동생 유관석이 태극기를 만들고 있는 모습도 만들어 놓았다.
버스는 이웃마을 지평리로 향했다. 이곳은 속장 조인원의 집으로 아들 조병옥 박사의 생가이다. 초가집이지만 반듯한 규모의 집이다.
조병옥은 일찍 히 아버지 조인원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 유학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에 감화되어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적극참여했다,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 경찰총수를 지냈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내무부장관을 거친 뒤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했다. 그 후 야당뢀동으로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 병이나 미육군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급서 하였다.
조병옥박사는 제1공화국 시절 여야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여당 대표들과 수시로 만나 절충을 주도하였다.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조병옥은 대한만국 정부수립과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안 평가와 함께 대구 10•1 사태, 제주 4•3 사건, 여순 사태 등에서 경찰지휘와 과잉진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바를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향동하는 성격으로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노련한 협상가로 능력을 발휘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조병옥박사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가 추구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공산화를 막는 방공정신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판단하기 바랍니다."
오전일정을 마치고 이곳 병천 순댓국에 막걸리를 곁들인 오찬은 훌륭했다. 120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기란 쉽지 않다. 노련한 집행부의 헌신적인 봉사가 우리 동우회를 끈끈하게 이끌어 주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코스는 태조산 각원사였다. 태조산은 후삼국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마침내 천하를 편안하게 했다는 고사에서 天安이 되었다. 각원사 대웅전과 청동 대불은 아마 국내 최대가 아닐까.
우리 동우회 새봄맞이 문화답사는 청동대불 앞에 드론을 띄워놓고 모두 120명이 두 손을 확 짝 벌려 흔들며 조국통일을 기원하며 마무리하였다.
"겨레의 불꽃이여 영원하라"
2026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