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개봉한 영화 '터미널'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는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됩니다.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날아오는 동안 고국에선 쿠데타가 일어났고, 일시적으로 유령 국가가 되면서 여권과 비자가 효력을 잃은 것인데요. 빅터는 입국도, 출국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오갈 곳 없던 그는 공항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의자에서 잠을 청하고, 공항 내 상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몇 년간 그곳에서 살아야 했죠. 영화는 '돌아갈 수 없는 나라가 없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김해공항 국제선 청사 2층에 마련된 출국대기실에는 기니 국적 남성 A(30대) 씨가 5개월째 체류 중입니다. 영화 ‘터미널’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김해공항에서 '공항 난민'이 발생한 것은 처음입니다.
A 씨는 본국에서 군부독재 반대운동을 펼치다가 정치적 박해를 피하고자 자국을 떠나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외국인이 난민 신청을 할 때, 인정 요건을 판단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난민협약 가입국이어서 A 씨는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산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죠.
지난 4월 김해공항에 도착한 그는 난민 신청을 했으나, 법무부는 A 씨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을 내렸습니다. 불회부 결정은 난민 신청을 받은 출입국 당국의 본안 심사로 회부하지 않고 종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난민 인정 요건을 형식적으로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인데, A 씨와 같은 난민 신청자는 입국이 거부됩니다.
이에 불복한 A 씨가 취소 소송을 위해 출국대기실에 수개월째 머무르는 것인데요. 정부는 그가 김해공항에 머무는 동안 햄버거로 대부분 끼니를 해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4일 A 씨는 김해공항 출입국 외국인사무소를 상대로 낸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 1심에서 승소했습니다. 당국이 항소를 포기하면 A 씨는 정식 난민 심사를 받을 수 있죠. 원고가 최종 승소하면, 당국은 난민 신청을 본안 심사 절차로 회부해야 하기 때문인데요.
난민 업무 지침상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 하급심에서 당국이 패소하면 원고 승소 확정을 조건으로 입국을 허가합니다. 이때 인천공항에서는 난민 신청자가 영종도 난민지원센터로 이동할 수 있으나, 김해공항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습니다. A 씨는 최종 승소하기 전까지 계속 공항에 머물 가능성이 크죠.
우리나라는 2013년 7월 1일부터 출입국 공항·항만 난민신청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항 등을 통해 들어온 난민은 공항 출입국사무소에서 난민 신청을 할 수 있게 됐는데요.
일반 출입국사무소와 달리 출입국항에서의 난민 신청은 심사 자격을 검증합니다. 즉 본격적인 난민 심사가 아닌 '입국해서 난민 신청을 할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회부·불회부 심사인데요.
'회부' 결정이 나면 난민 신청이 접수되고 입국한 뒤 인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불회부' 결정이 나오면 입국이 불허돼 난민 불인정 처분을 받은 것처럼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공항에서 무기한 대기하는 공항 난민이 됩니다. 불회부 처분에 이의 신청 절차는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행정소송을 통해서만 취소할 수 있죠.
난민인권센터에 의하면 지난 10년(2013~2022년)간 한국 공항에서의 평균 회부율은 36.2%에 그쳤습니다. 공항에서 난민 신청 의사를 밝힌 10명 중 3명만 입국이 허가됐다는 뜻인데요.
지난해 공항·항만에서 288건의 난민 신청이 있었습니다. 이 중 104명만 입국이 허가됐다고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공항에서 나와도 난민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지난해 기준 난민 인정률이 1.75%에 그친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법무부가 공개한 '난민 신청 및 심사 통계'를 보면 지난해 국내에 접수된 난민 신청 건수는 1만8336건으로 집계됐습니다. 2023년(1만8837건)보다 조금 줄었지만,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수치입니다.
2013년부터 공항·항만에서 바로 난민 신청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급격히 늘었습니다. 2013년 1574건이던 난민 신청은 2018년(1만6173건) 1만 건을 넘겼고요. 국경이 봉쇄된 코로나19 팬데믹 2년간 1만 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늘었는데요.
난민 신청 증가세에 견줘 인정률은 턱없이 낮습니다. 1994년 이후 한국의 난민 누적 인정률은 2.7%. 2023년 기준 유럽연합(EU)의 평균 난민 수용 비율이 43%에 달하고, 전 세계 190개국의 2000~2017년 난민 인정률 평균이 30%에 육박하는 것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