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딱 하루 앞둔 13일 아침. 딸은 어깨에 멘 책가방에 더해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끌고 종아리가 땅길 만한 오르막길을 걸어 학교로 갔습니다. 매일 바라보는 뒷모습이지만 유독 짠했습니다. 그 큰 여행용 가방은 딸이 고등학교 3년간 보던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으로 가득 채워져 다시 집으로 돌아오겠죠. 교실과 자습실에 둔 물품을 수능 전날까지 모두 치워야 한다네요.
짐을 정리하며 온갖 생각을 했을 듯합니다. 파릇파릇한 청소년기, 수많은 수험생이 새벽잠을 설치며 한 자라도 더 눈에 넣으려고 얼마나 애썼을까요. 글자와 숫자, 온갖 공식이 빽빽이 들어찬 교과서 문제집 등은 이들에게 엄청난 삶의 무게였을 겁니다.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 그 무게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시험 날이 다가올수록 긴장과 떨림이 잦아지고 두려움은 더 커졌겠죠. 단 하루, 단 한 차례 시험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심정은 오죽할까요.
14일 전국 시험장에서 52만2670명의 수험생이 수능을 치릅니다. 선택 과목도 다양하고 주의 사항도 참 많습니다. 다들 실수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수험생이 만족할 만한 점수를 얻지는 못할 겁니다. 상대평가가 숙명인 시험에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차마 시험 잘 치르라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그저 마음 다치지 말고, 씩씩하게 시험장으로 들어가서 당당하게 나오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정말 고생했습니다.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이 뉴스레터를 독자들이 열어볼 때쯤이면 수능 시험이 한창 진행되고 있겠죠. '글을 쓰면서 읽은 책을 들이대는 것은 게으르고 졸렬한 수작'이라지만, 게으름도 필요할 때가 있으니 책 제목 하나 들먹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바로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가 폴 라파르그가 지은 '게으를 권리'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하듯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착취, 노동을 신성화하는 흐름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내용입니다.
아직은 어린 수험생에게 거의 유일한 노동은 내신과 수능을 위한 공부가 아니었을까요. 수험생을 둔 학부모 역시 돈 버는 것보다 더 고된 노동이 자녀를 돌보는 일 아니었을까요. 날마다 마음 졸이고 아파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수능이 끝나고 나면 다만 며칠이라도 '노동'을 접고 게을러지기를 권합니다. 또다시 논술 시험을 준비해야 할 수험생도 있겠지만, 짧은 며칠이라도 게을러지면 좋겠습니다.
수험생 여러분, 그리고 학부모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