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교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치원 때도 원복을 입었으니 나는 5살부터 19살까지 교복이란 걸 입고 살아왔다. 무려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정해진 복장만 입었던 나는 성인이 돼서야 사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답답했을 텐데, 어떻게 계속 입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꽤 높은 교육열이 만들어낸 참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학창시절 교복 단추보다 나를 답답하게 하고 옥죄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건 뭐랄까. 열등감 비스름한 그런 감정이었다.
더운 여름날, 교복 입은 초등학생 무리가 강당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들 중 나도 있었다. 앞줄부터 꽉꽉 채워 앉은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컨을 틀어도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숨소리가 짜증이 났다. 곧이어 선생님들이 들어오고 한 명의 학생을 앞으로 불러냈다. 잘 땋은 머리와 교복이 무척이나 어울리는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계단을 당차게 걸어 올라가 교장 선생님 앞에 섰다. “이 학생은 탁월한 성적으로 입상하였기에 이 상장과 상패를 드립니다.” 상장과 상패가 그녀의 손에 들렸고 그녀는 환한 미소로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분위기를 생각하며 손뼉을 치며 그녀가 빨리 단상에서 내려오길 바랐다. 난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부러웠고 나도 언젠간 저 자리에 올라설 것이라 다짐하며 강당을 빠져나왔다.
문제는 그 아이는 전국 초등학생골프대회에서 2위를 해서 상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골프를 살면서 쳐본 적이 없을뿐더러 골프의 규칙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골프공이 어떻게 생겼냐 정도였다. 누구에게나 열등감이나 질투심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좀 심한 편이었다. 그냥 알지도 못하고 모르는 것에도 시기했고 내 주변 모든 이들에게 질투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그때 나는 이런 마음을 꽁꽁 보이지 않게 여러 번 포장하고 감쌌다는 점이다. 만약 내 속마음을 모조리 남들에게 꺼내어 보여주었다면, 지금 내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이 맞는 진짜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살아가다 보니 얘랑은 평생 가겠다고 생각이 드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항상 같이 다니고 함께 한다는 친구들이 있기에 외로웠던 나의 삶은 그나마 윤택해졌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열등감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차차 열등감은 나를 잠식했고, 겉은 그대로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유쾌한 척을 하며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만 무언가 공허하고 이질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듯 느껴졌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도 겁났지만, 난 나 자신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슬퍼했다. 가족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고 그들이 기쁘다고 느끼면 나도 기쁜 그런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나는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했다. 때론 증오했다. 너희들은 그 정도가 아닌데 왜 나보다 잘났을까. 부러운 걸 부럽다고 하지 못했고 잘했다고 칭찬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그보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건 내가 우연히 허접한 상을 하나 받았을 때였다. 나는 변변치 않은 상이 나를 대변하는 듯 보여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몰려오더니 축하한다며 내 머리를 만지고 상 좀 보자며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우와 부럽다.” 친구 중 놀기 좋아하던 H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몰려와서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아이들은 각자의 반으로 떠나갔다. 국어 수업이 시작됐지만, 나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할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으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나에게 열등감을 극복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극복하지 못했으며 아마 평생을 이것과 함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욕망이고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마디로 불가항력이다. 열등감은 무조건 나쁜 게 아니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보다 잘났고 부럽다고 느낀다면 나도 그 사람을 뛰어넘겠다는 욕망이자 삶을 잘살아 보겠다는 욕망이기에 날 더 나은 길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 열등감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잘 이용한다면 꿈이라 생각했던 일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헤치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건 최근의 일 때문이다. 친한 친구인 D는 최근 인테리어 가게를 오픈했다. 뭘 할지 항상 고민만 하던 친구인데, 나름의 직업을 찾게 된 친구다. 우리 또래의 친구 중에서 아마 D가 가장 먼저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내 앞가림도 하지 못하고 독립도 하지 못했는데, D는 벌써 자기 밥그릇은 챙긴다는 생각이 들며 조금의 부러움이 들었다. 원래 같으면 부러움을 느낀 다음에 D와 나 자신을 비교하며 평가하는 내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난 그러지 않았다. 그냥 D가 하는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곤 우린 가게 영업시간이 끝나자 셔터를 내리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들로 술자리는 가득했지만 그 순간이 좋았다. D와의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D는 와줘서 고맙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D에게 내가 더 고맙다고 말하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정말 고마웠다. 열등이라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녀석이기 때문이다. 새벽의 도로는 정말 고요했다. 기사님은 잔잔한 음악과 함께 도로를 지나갔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문뜩 D가 언젠가 우리 집도 한번 손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니까 조금 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