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비결 #1

by 호박씨

아들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후 5:30분에 미도산으로 향한다. 오늘은 딸아이가 친구랑 놀러 간다고 빠져서 아들과 둘이 간다. 아들이 원체 말이 많지 않고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이다. 걔다가 아직도 영어가 편한 아이라서 나와의 대화, 그리고 비대면 수업 외에는 영어의 세상에 아직도 사는 아이다. 리터니 ( 주재원 자녀로 한국에 들어온 학생들을 이르는 용어다.) 중에서도 최악의 리터니가 바로 코로나 리터니야 라고 자기 연민을 주야장천 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아들의 교우 관계이다. 딸아이는 집 주변 또래 친구들이 많이 생겨서 신나게 동네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반면에 아들은 일주일에 세 번 가는 수학 학원 말고는 또래를 만날 일이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미도산으로 가는 오후 등산 시간은 영어로 대화할 이가 없는 아들의 그야말로 수다타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아이가 정신없이 영어로 블라블라 떠들면서 미도산으로 향하면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본다. 심지어는 등산길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이

" 영어 정말 잘하는구나." 하고 말을 걸기도 하신다.

귀국해서 초반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이 나에게

" 엄마, 아는 사람이야? "

하고 묻는다. 아는 사람이 아닌데 말을 걸어오고, 걔다가 할아버지들의 한국어는 아이들이 알아듣기는 힘드니 아이들이 대꾸도 못하고 나에게 와 물어본다. 내 나라에 오니 아이들이 외국인이다. 주재원 살이를 내 나라 살이 같이 하겠노라며 살아온 시간들이 좀 후회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적당히 할 것을 싶다.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이들 둘만 상갓집 한 편의 작은 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는 종종 생겼다. 둘은 여전히도 모든 미디어를 영어로 보고 있다. 영어를 한국어보다 편하게 느끼는 아이들을 늘 봐 왔고, 코로나가 꼼짝없이 외부와의 연락 없이 셋이 있다 보니 으레 아이들은 시간이 멈춘 듯 영어의 세상에 살고 있구나가 나의 생각이었다.

아주버님이 아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들으시더니 한마디를 하신다.

" 영어를 안 까먹고 잘 유지하고 있네요? "

"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먼저 자리 잡고 있어서 영어가 더 편하다네요. "

신기해하신다. 아이들이 영어 학원을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았다는 것도, 여전히 편안하게 영어 속에서 지내는 것도 신기하게 생각하신다.


나의 학창 생활은 내내 한국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어떤 교육학 전공자도 아니며, 대학 다닐 때 남들 다 가던 단기 어학연수조차 간 적이 없다. 나도 주변서 많이 가던 캐나다나 호주, 미국 등지로 가서 돈으로 언어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의 현재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유치한 생각도 한 적이 많았다. 유학 박람회를 혼자 갔다 와서 쭈뼛거리며 부모님께 어렵게 말을 꺼내도 거절당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흔한 토익 학원 한번 안 가고 900점이 넘는 성적이었으며 ( 만점은 못 받아 보았다.), 졸업 후 해외영업 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국제 학교 재학 기간 동안에 내 아이들의 머릿속에 영어를 제1 언어로 만들어 냈다.

물론 국제학교라는 자리만 깔아주면, 국제학교를 5년 정도 다니면 영어는 당연히 잘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할 수 있겠다. 나도 그리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제 주변을 좀 둘러볼 여유도 생기었고, 위드 코로나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리터니들과 연락을 해보니 두 아이들의 영어 상태는 양호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독일의 주변 주재원들이 볼멘소리로 영어 고민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눈다. 유럽 주재원이 제일 애매하다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중국이나 동남아 주재원은 한국과 가까워서 주재원 특화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와 입시 준비를 할 수 있다. 미국 주재원은 가만 앉아만 있으면 영어 실력이 알아서 쌓인다. 숨 쉬는 공기 조차 영어이니 말이다. 유럽 주재원은 한국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어서 한국을 들락거리며 학원 다니기도 힘들며, ( 남아공보다는 가깝다고 하겠다.) 주재원 수도 미국이나 중국, 아시아 등지보다는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한인 영어학원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독일은 특히나 영미문화로부터의 자국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공 기관에서는 독어 사용을 권장하며 영어 사용을 금하는 면까지 갖고 있다. 외국 영화는 독일어로 더빙되어 상영되어 한국처럼 자막이 있는 할리우드 영화는 찾을 수 없다. 이런 독일에서는 사실 생활 패턴이 일상에서의 독일어 30%, 학교에서의 영어 30%, 가정에서의 한국어 30%의 언어환경이라 하겠다.


프랑크푸르트 국제학교에서는 학기가 시작할 때 한국 엄마들을 위한 ESL 설명회를 연다. 한국 학생의 ESL 수업 수강 비율이 높다 보니 학교에서 한국 엄마들 만을 위한 ESL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 것이다. 한국 부모들을 도와주는 교내 한국인 코디네이터와 ESL 담당 교사들, 교장 선생님까지 참석하는 큰 행사다.

일종의 영어 보충 수업인 ESL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본 수업을 빠져야 한다. 이때에 본 교실에서는 독일어 수업을 주로 진행한다. 영어가 먼저, 그다음이 독일어여야 학교 생활이 원활한 까닭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경우 영어실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독어 시간은 물론 주요 과목 시간에 ESL 수강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ESL 수업을 들어서 영어 실력을 올려야 하는데 이와 동시에 참여하지 못한 본 수업 내용도 따라가야 하니 이중고를 겪게 된다. ESL 담당 교사가 제공하는 ESL 시험 Pass로 가능한 ESL 졸업은 국제학교 학부모들에게는 초유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겠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국제학교들에서 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를 수강하는 학생들의 평균 ESL 수강 기간이 3년에서 4년이다. 이 환경에서 작은 아이는 ESL 수업에 참여한 적이 없고, 큰 아이는 만 2년 만에 ESL을 졸업했다. 아이들이 받은 교육은 국제학교 교육이 전부다. 작은 아이는 ABC를 모르고 독일에 갔고, 큰아이는 ABC만 알고 독일에 갔다는 사실도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이제 국제 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다 영어 속을 자유로이 헤엄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신다면, 이제 이야기는 22살의 호박씨로 돌아간다. 그래야 이야기의 순서가 옳게 배열된다. 22살의 호박씨는 회계사 시험을 본다는 핑계로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빈둥거리기 시작하다. 그러다 한 책을 만나게 된다. 책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