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비결 #2

- Sleepless in Seattle

by 호박씨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제목이 매혹적이다.

호박씨는 당시 회계사 공부를 한다고 경영대를 2학년까지 마치고 휴학 중이었다. 같은 과 사람들이 한 번쯤은 꿈꿔보는, 경영대 나온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중 가장 안정적인 것이 바로 회계사다. '사'가 붙은 직업이다. 휴학계를 내기에는 참으로 좋은 구실이라 할 수 있겠다.

경영대의 꽃인 회계사는커녕 경영 전공 자체에 회의감 가득한 나는 이 고민을 공유할 이, 이 고민에 답해줄 이 하나 없어 그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냅다 휴학계를 내고 빈둥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의약분업으로 부모님의 약국은 벌집 쑤셔 놓은 듯했고 전산 일을 할 인력이 부족했다. 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에겐 꿀알바의 기회였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만 병원 처방전 입력과 제약 코드의 전산화에 이바지하면 나의 휴학 사유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출 수 있다. 시간의 부자가 된 듯했다. 시간의 부자가 되면 인간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한다. 호박씨로써는 서점에 가는 일이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영풍문고로 걸어간다. 영풍문고는 사람도 없이 한적하다. 그때 나를 부르는 한 사람, 아니 한 책이 있었다. 일명 영절하였다. 당시로썬 센세이셔널한 책이었던 지라 줄여 부르는 애칭도 생겼었다.

영절하의 저자 정찬용 씨는 독어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6개월 만에 독어와 영어를 독파하고 석사까지 따고 한국으로 돌아와 본인의 석사 학위와는 상관없이 영어공부 책을 발간하신다. 이 분이 독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는데, 10년 후 독일에서 이 책의 원리를 내가 몹시 써먹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세상 신기하다.


그 자리에서 그 책을 전부 읽어 버렸던 순간이 기억난다. 책을 사는 습관 중에 하나인데 속독으로 책을 한 번 통과한 다음 이 책의 진액을 빨아들여 나의 삶 속으로 복사를 할 필요가 있다 싶은 것은 구매를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한 번 쓱 통과한 다음, 내 인생으로 삼고 싶다 싶으면 사서 소장하고 두고두고 본다. 영절하는 그날 사기 전에 모두 읽었으며, 사고 나서도 3번 정도 더 읽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중 가장 신뢰가 가는 점은 부록으로 책 뒷장에 붙어 있던 테이프였다. 영절하의 논리를 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키였다. 그 테이프 때문에 저자의 논리가 설득력이 갔다.

유아가 언어를 익힐 때, 같은 단어를 수백만 번 듣고 나서 입으로 나온다. ' 엄마'라는 말을 수백만 번 듣기에 그들의 첫 단어는 '엄마'다. 우리의 뇌는 셀 수 없이 많이 반복적으로 듣고서야 비로소 말로써 그 단어를 소화해낸다. 성인이 영어를 배울 때에는 유아의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성인이 관심을 갖고 있을 법한 주제의 콘텐츠로 수백만 번 듣고 뇌에 새김으로써 영어의 입이 트인다는 것이다. 수백만 번 머리에 새길 콘텐츠가 책 뒤에 두 개의 테이프로 붙어있었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테이프 두 개만 달달 외우면 입이 트인다니 말이다.


24시간을 들었다. 약국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내내 테이프를 들었다. 내용은 내 나이 또래 또는 그보다 나이 든 성인들의 일상 대화다. 장애인 주차장에 불법 주차하기, 성차별에 대한 문제 따위를 다루는 내용이었다. 아기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지만 성인이 아기처럼 엄마라는 단어부터 외국어를 배우기는 힘들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영절하 테이프의 내용 자체가 내 마음에 쏙 들었으며 녹음자들의 어투도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일본식의 고루한 영문법이나, 학교 어학당에서 늘 하는 자기소개, 취미 소개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살아있는 영어를 뇌에 새기면 내 입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유쾌함이 내 귀를 가득 채웠다.


내용을 열심히 들었다면 이제 쉐도잉을 할 차례다. 지금은 쉐도잉이라는 그럴듯한 단어가 영어 받아쓰기와 영어 리스닝에 이름 붙어져 있다. 당시 이 행위에 주어지는 타이틀은 무식하게 다 받아쓰기다. 테이프 한 개에 3개 정도의 대화가 있는데 10분짜리 첫 대화를 끝내는 데 일주일 남짓 걸렸다. 일주일 만에 대화 고작 1개를 끝냈지만 그 만족감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테이프를 단어마다 끊어가며 받아쓰고,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문장을 채워나간다.

두 번째, 세 번째 대화는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개의 테이프에 대한 받아쓰기를 다 마무리하였다. 단순하고도 절도 있으며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나는 스스로 위로를 줄 수 있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하는 중이 아니며, 헛되이 휴학 기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지막이 나에게 중얼거려주었다.


대화 6개, 테이프 2개를 듣는 다고 해서 입이 트이는 것은 아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말아라'는 시작일 뿐, 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은 아니다. 그래서 나만의 응용 버전에 들어간다. 나만의 대배우 맥 라이언의 명작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쉐도잉 하기 시작한다. 1시간 45분짜리 영화이니 하루에 2번 정도 보고 나면 기진맥진한다.

그럼에도 2번 이상씩도 시청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를 나는 사랑했으며, 맥 라이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도, 영어도 나는 사랑했다. 지치지 않고 같은 일을 몇 주씩 할 수 있었다. 영절하의 저자는 석사를 따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독일 현지에서 6개월 만에 독어를 독파했다. 나에겐 휴학의 명분이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지치지 않고 비디오를 시청하여 내가 존재하는 그 공간을 미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약국 알바 시간은 단순 입력 업무라 오전 내내 영어에 시달리던 나의 뇌는 약국 컴퓨터 앞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드디어 비디오를 쉐도잉 하는 시간. 2시간 남짓의 비디오를 받아쓰기를 하자니 일주일이 아니라 보름도 넘게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면서 내 귀는 예민해져 갔다. 톰 행크스의 동굴 같은 저음은 받아쓰기하기 힘들다. 맥 라이언의 말 중에 내가 한국어로도 모르는 단어는 아무리 들어도 알 수가 없어서 들리는 소리대로 스펠링을 적어둔다. 그렇게 알게 된 단어는 절대 잊지 않는다. 알파벳 한 자 한 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의 계획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When Harry met Sally와 유브 갓 메일 You've got mail까지 이렇게 집에 소장하고 있는 맥 라이언의 비디오를 모두 받아쓰기할 계획이었다. 이실직고하자면 비디오 한 개를 쉐도잉 하고는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여섯 권의 피땀 눈물 어린 공책들이 남아있었고 토익 문제집을 풀지 않고 토익 시험을 보러 가는 객기를 부릴 영어 자신감도 생겼다. 영절하를 끝내고 토익시험을 보니 800점대가 나왔다. 몹시 만족스러웠다. 토익 교재를 하나 사서 빈출 단어와 시험 유형을 공부하니 토익 점수는 900점이 넘게 나왔다. 그리곤 더 이상 영어를 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만큼 당시의 나는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에 사로 잡혀, 모든 것에 의욕 없는 대학생이 되어 학교로 돌아갔다.


휴학 기간 동안의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진 못했다. 그래서 영절하의 경험은 나의 기억 속에 묻혔고, 그 후의 10년을 나는 인생의 바닥도 아니면서 이게 바닥이라며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그 시간과 시간으로부터의 얻은 지혜를 써먹을 기회가 호박씨에게도 온다. 삶이란 '일차함수'는 아니지만, 투입한 x에 대한 y 값이 생의 언젠가는 나오는 그야말로 ' 언젠가는 함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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