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비결 #3

사교육 없이 영어를

by 호박씨

14년 10월에 발령이 나고 남편이 국제학교 신청을 하러 프랑크푸르트로 출장을 가자 나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내 눈에는 다음 해 3월에 동네 초등학교에 입학 예정이었던 아들만 보인다. 딸에겐 이래저래 미안한 일이다. '잠깐만 기다려줘라. 딸아.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가 내 마음이지만 단순히 이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늘 둘째에겐 기다려라만 외치고 뒤로 밀어두는 것은 아닌지, 죄스런 마음이 든다. 국제학교에서 그리고 타국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익힌 과정들을 글을 쓰려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한 것은 큰 아이뿐이었다. 큰 아이에게 진을 다 빼고, 둘째를 바라보니 어느덧 원어민의 발음과 어휘를 가진 딸아이다. 나의 이 죄스러운 마음은 이제 살아가면서 갚아가야겠다. 또한 현재의 딸아이가 나아갈 바가 많으니 다행히도 나에겐 만회의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 감사할 일이다.


둘째는 만 4세에 국제학교 부설 유치원 Primary의 전 학년을 지나며 혼자서 영어를 해나갔다면, 첫째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발령 당시 첫째는 성인의 영어 배우기, 즉 영절하의 비결을 적용시켜야 하는 상태였다. 이미 한국어라는 모국어가 생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들인 첫째는 남자아이 치고는 말이 빠른 편이었고, 한글도 혼자서 깨쳤다. 아들에겐 한글을 가르친 적이 없다. 다만 자기 전에 두 아이가 골라오는 책을 한 권씩 읽어 줬고, 어린이집이 끝나면 같은 건물 3층에 위치한 어린이 도서관에 데려갔다. 작은 애는 어린이 도서관에 가면 읽어달라고 책을 들고 오거나 같이 간 친구와 놀거나 하는 반면에 큰 아이는 책에 집중을 했다. 글의 맛을 알았다.

그 맘 때에 아이가 집중적으로 보던 것이 마법 천자문 같은 교육용 만화였다. 어린이집에서 7세가 되면 학교 입학 준비를 한다고 ㄱ,ㄴ,ㄷ을 쓰고 단어를 받아쓰는 시간도 갖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이가 책을 즐겨 읽음에 만족하고 한글을 쓰는 것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글을 즐기게 하고 싶은 마음에 학습으로 한글을 내밀지 않았다. 이런 나의 바람에 맞게 아이는 만화책이든 글밥이 제법 되는 책이든 즐겨 조그만 그 어린이 도서관에 가기를 좋아라 했다. 은행 통장 모양의 대출기록 카드가 한 장 한 장 채워져 가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에도 우리가 해외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참말로 나는 11월 말 남편이 나에게 전화를 주기 전까지 큰 아이를 동네 초등학교에 보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영어를 교육시키지 않았던 내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당시 영어유치원의 전성기였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도 스마트펜과 하드커버의 영어 교재를 일주일에 한 권씩 나눠주고 외부서 초빙한 영어 선생님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영어수업을 해주고 있던 때였다. 국공립어린이집에서도 이렇게 영어 수업이 한창인데, 다른 곳은 오죽했을까? 주변 유치원들은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영어 수업에 시간을 할애했고, 파란 눈의 외국인 선생님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셔틀로 30분이 넘게 걸리는 목동에서 월 100만 원이 넘는 영어유치원 셔틀이 오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난 전혀 팔랑귀가 되지 않고 국가지원금 받고 내 돈 10만 원 보태서 다니던 어린이집을 두 아이 모두 재원 시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며 나를 돌이켜 보면, 영절하의 체험이 막연하게 나에게 자신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일단은 우리말이 되지 않으면, 영어로 호환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가르치지 않은 한글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책을 읽었다. 한국어를 잘하고 모국어의 지식수준이 높다면, 영어는 영절하와 같은 몰입과 자기 노력의 시간을 통해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내심 믿고 있었다.

이렇다고 해서 사교육에 돈을 안 들인 것은 아니었다. 투철한 홈스쿨링의 철학이 있어서 사교육비 없이 키워 내고 있던 중은 아니었다. 외벌이 남편 월급으로는 집으로 방문하는 교구 영사님의 상품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아이들 돌반지를 남편 몰래 팔아가며 야금야금 교구와 전집을 사들였다. 교구들은 100에서 150만 원 정도 했고, 독일 발령 1년 전까지도 나는 1년에 한 번씩은 교구와 전집을 질러댔다. 마지막으로 지른 것인 영어 교구였다. 교구만 덜렁 들여놓고 가지고 놀라고 애들 앞에 풀어놓고만 있었다.


당장 2달 뒤부터 큰 아이가 초등학교가 아닌 국제학교를 다녀야 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영절하와 몰입은 새까맣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는 당황과 근심에 사로잡혔다. 영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교구로 영어를 가르칠 방문교사 일정을 잡았다. 약국에서 4시에 퇴근하여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면 5시쯤 된다. 저녁을 먹고 7시부터라면 여유 있게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인 나에게는 그만하면 여유 있는 스케줄이었다. 7시부터 8시까지 매일 1시간씩 , 그렇게 한 달을 7살짜리에게 영어수업으로 들이밀었다.

12월의 어느 날, 교구가 늘어놓아진 아이의 방문 앞에 선생님을 배웅하고 들어온 나를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다. 뭔가 할 말이 있나 보다.

" 엄마, 나 너무 피곤해."

"....."

미안했다. 몰라서 미안했다. 공포에 사로잡혀 나를 잃어버려서 미안했다. 아이는 피곤해 보였다. 7살짜리 입에서 피곤하다는 말이 나온 그날부로 영어 수업은 끝이 났다. 아이의 한 마디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일 1시간씩 두달을 한다고 하여, 알파벳을 익히고 간다고 해서 뭣이 그리 달라질까 싶다.


고가의 교구들은 독일 집 Keller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후일 국제학교에 책과 스마트펜만 기증했다. 천연 원목으로 만들었다는 그 유기농 교구들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다. 나는 마법천자문 30권 정도 컨테이너에 싣었다. 2014년 12월까지 나온 마법 천자문 시리즈를 모두 다 사서 싣었다. 아이가 엄지 척을 해주었다. 도서관에서 늘 너덜거리던 책을 빌려보다 반짝이는 비닐이 덧씌어져 있는 깔끔한 표지를 보자 아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을 테다.

" 아들아, 실컷 읽어. 독일 가면 한국 책 없어."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국제 학교 입학 일주일 전까지는 내 머릿속에 살아있었다. 하지만 입학일부터 영어 때문에 된통 당한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심과 자신감 상실을 아이에게 투영시켰다. 큰아이가 국제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를 잃어버리면 아이에게 나는 엄마가 될 수 없다. 나부터 그저 흔들리는 어린 영혼이 될 뿐이니 말이다. 그때에 나는 엄마가 되려면 일단 잃어버린 나부터 찾아야 했다. 영어문제를 해결해야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국제학교는 가혹하지만, 첫날부터 나에게 차갑게 알려준다. 아픈 매는 먼저 맞아야 해 라고 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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