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실체

by 호박씨

2015년 1월 국제 학교에 가는 첫날이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긴장했다 했다. 아는 게 병이다.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지만 나에겐 믿을 구석이라곤 나뿐인 것이 이 떨림의 원인이다.


한국이었다면 두 달 뒤인 3월에 아파트 단지 안에 한 동 건너 위치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었겠다. 국제 학교는 8월에 학년이 시작하므로 1월이면 2학기의 시작 언저리다. 2학기 시작이라고 해서 특별히 2학기다고 언급하진 않는다. 수업일수 따라 seceond term 시작일이라고 공식 일정 캘린더에 쓰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와 내 아이들에겐 첫날이지만, 학교로써는 여느 날과 다름이 없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각국 회사 주재원과 미 대사관에 인사이동으로 신입생들이 있는 바라 학년 시작보다는 규모가 작은 오리엔테이션이 열린다. 한국은 3월에 학년이 시작하므로 고학년 자녀가 있는 한국 주재원들은 학년을 마친 3월에 이동이 많다. 나의 두 아이들이 학기나 출석일수와는 상관이 없는 나이이다. 아이들은 구립 어린이집을 몇 년째 다니고 있었기에 남편과 나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 국제학교를 하루라도 빨리 다니게 하는 게 남는 장사다 싶었다. 1월 1일부터 주재원으로 독일 법인에서 업무를 봐야 하는 남편과 함께 입국을 했으니 신입생 중 우리 가족 같은 한국인을 찾긴 쉽지 않다.


Primary 유치원 연령대에서는 한국 아이들 숫자도 적은 편이다. 전 신입생 설명회가 끝나고, 프라이머리 스쿨 교장선생님의 인솔 하에 프라이머리 신입생 부모만 모였는데 10명 남짓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대강당은 Upper school, 중고등학교 건물인 본관 1층에 있고 프라이머리는 교정의 정반대 쪽이다. 교장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대운동장과 놀이터를 지나간다. 놀이터를 벗어나면 양 옆에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내와 오솔길이 나온다. 오솔길에 다다르면 이 국제학교가 멋진 터에 자리 잡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나이가 100년은 되어 보이는 침엽수들이 그 오솔길을 따라 빼곡히 서있다. 숲과 오솔길 사이는 갈대와 풀들이 이루는 좁은 늪이 있어 작은 물웅덩이들도 군데군데 보인다. 운이 좋으면 따뜻한 날은 개구리알이나 올챙이도 볼 수 있다.


교정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의 눈길은 그저 방황하고 있다. 탁 트인 외부에서 드문드문 이 들려오는 교장의 영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시간에 걸쳐 진행됐던 전 신입생 설명회의 쏟아져 내려오는 영어에 이미 과부하가 걸려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교장선생님은 영국인이라 나에겐 낯선 악센트를 구사하고 있다. 눈으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귀는 반도 넘게 교장선생님 쪽으로 쫑긋하고 있는 나는 영락없는 신입생 엄마다.

10명이 다 신입생 부모인데 내가 제일 fresh 그야말로 신선해 보였겠다. 교장 선생님의 양 옆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교장 선생님의 뒤를 삼삼오오 밟아 갔다. 바로 옆으로 가자니 알아듣지 못하는 말 시킬까 봐 두렵고, 뒤에 따라가자니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고 이도 저도 맘에 안 든다. 아시안 엄마 한 명은 눈에 띄는데 한국인인지 아닌지 알기가 힘들다. 그녀는 옆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국제학교 교직원인 양 단정하고 안정적인 모습이다. 부럽다.


두 아이들은 각자의 교실 Homeroom에 아침 일찍 데려다준 상태다.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겠다는 말은 선생님께 할 수 있을는지 사실 걱정이 태산이다. Bathroom이란 단어를 알려 주었고 위치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아이들 생각이 틈만 나면 떠오른다. 내 마음의 1/4은 아이들의 교실에 한 개씩 나누어 두고 왔고, 나머지 1/2만이 여기서 영어를 소화하니라 고군분투다. 신경을 다 쏟아 넣어도 알아들을까 말까인데 이렇게 마음의 반만 데리고 있는 중이다.

프라이머리 건물에 도착했다. 교장선생님은 건물 2층에 있는 도서관, 음악실 미술실을 보여주시고는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다과를 함께 하자고 한다. 동그랗게 모여 앉은 10명들 모두 네이티브 같다. 나를 소개하는 순서도 일찍 와서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만나서 반갑다는 말과 두 아이가 프라이머리에 있게 되었다는 정말 간단한 영어만 말했는데도 네이티브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입이 쉬이 떨어지질 않는다.

소개가 끝나자 질문 시간이다. 나는 지금 듣는 데도 안감힘인데 소개 시간을 통해 한국인으로 밝혀진 무리의 아시안 엄마는 질문도 한다. 나도 궁금한 것은 산더미이니 질문하는 그녀가 또 부럽다. 말이 막히면 어쩌나 싶어 미리 질문거리를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영작하다 보니 이마가 뜨끈해져 온다. 머리 돌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옆 사람에게도 내 머리 돌아가는 드르륵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고민만 하다 질문은 못하고 그날의 오리엔테이션은 끝이 났다. 아쉽지만 한 숨은 돌렸다.


쉬어볼까 하고 시계를 보니 다행히 아이들의 수업이 끝나기까지 30분이 넘게 남았다. 방과 후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 시간 동안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방과 후 담당자 오피스 번호를 보니 카페테리아 바로 앞이라 질문할 바를 미리 중얼거리며 오피스로 향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되어 힘껏 뛰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날 그 오피스는 안 가고 싶다. 카페테리아에 남아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오리엔테이션도 잘 끝났고, 하루도 잘 지나가고 있다고 말하겠다. 오래간만에 영어가 쏟아져 내려오니 다 소화하기가 버거운데 이 또한 시간이 가면 나아지지 않겠냐고 말하겠다. 남편이 밝게 맞장구쳐주었을 테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닥터 스트레인지도 아닌 관계로 나는 오피스로 걸어간다. 방과 후 담당 오피스라고 문 앞에 팻말이 붙여있다. 질문이 있다고 하니 assistant직원이 담당 매니저가 저 사람이라고 알려준다.

거구의 남성이 제일 안쪽 책상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다. 이 사람 아까 전체 오리엔테이션 때 나왔던 사람이다. 삐딱하게 Big League chew 야구 껌을 씹어대는 미국 야구팀 감독 같아 보이는 그는 2시간쯤 전 대강당에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설명했던 이다.

" 아이들이 방과 후 신청 기간이 지나서 입학을 했는데 방과 후 수업에 혹시 참여할 방법은 없을까?"

영어였으니 반말이어야 맞겠다. 당시 방과 후 수업 신청의 치열한 경쟁률을 알 턱이 없는 나는 수강인원이 미달되어 있는 어떤 수업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교가 2시니 꽤나 이른 시간이라 생각됐고 방과 후 수업을 한 과목 정도 아이들이 참여해서 영어의 속도를 높이고 싶은 욕심이었다. 돌아온 그의 답은 이러하다.

" 오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참석했어? "

" 응."

" 그럼 내가 설명한 방과 후 신청 기간과 방법 들었어? "

" 아.. 듣긴 했는데 잘 이해는 안 가서."

" Do you speak English? "

영어는 할 줄 알아 라고 그는 묻는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대답 없는 나에게 모니터를 돌려주었다. 모니터에 방과 후 신청란을 보여주며 기간이 되면 여기로 클릭해서 신청하면 된다고 말한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니다. 추가 모집이나 충원의 기회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영어를 알아듣긴 한 것일까?

암말 없이 듣고 있던 나는 이 모니터와 이 야구 껌 같은 인간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일단 나가자.

" O.K. Thank you."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미소 띠지 않고 말했다. 고맙다고 말이다. 국제학교는 호박씨 너에게 만만치 않을 것이니 준비하라고 사인을 주었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피할 데 없이 다 맞아야 하며, 아이들에게 내가 피할 곳이 되어줘야 한다는 수신호를 날려준 그다. 고맙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오피스 밖을 나오니 아이들이 나올 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웃으면서 아이들을 맞아야 한다. 오늘은 아이들의 소중한 국제학교 첫날이다.

하루 종일 한 내 걱정의 무게만큼 아이들의 첫날은 어떠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교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에게 미소 지어주고 더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걸어왔다. 집은 프라이머리 교문에서 걸어서 10분이다. 텅 빈 집에 도착해 아이들에게 단 것을 쥐여주고 방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서 보낸 컨테이너가 도착하려면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하기에 집도 방도 텅 비어 신호음 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 여보, 오늘 나 진짜 별로였어."

말이 길게 나오진 않는다. 너 영어는 할 줄 아는 거야라고 나를 모욕한 방과 후 담당자 나부랭이 때문에 기분이 많이 별로야라고 말할 정신력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러면 남편 맘도 한결 가벼워졌을 테다. 국제 학교란 다국적의 사람들에게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니 상대의 영어에 대한 포용이 교직원의 기본 소양이 아니겠냐며 담당자를 비난했었더라면 속이 후련했겠다.


나는 남편에게 나의 모자란 영어를 자책했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출근한 지 겨우 열흘이 된 남편이 심히 바쁠 것을 알기에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남편과의 짧은 통화가 끝나자 마음속에서 단단한 무엇인가가 차오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다 싶다. 준비 없이 영어를 하진 말자 싶다. ' 영어 공부 절대 하지 말아라'의 경험을 되새겨 보자. 나의 성공 경험 속에는 앞으로의 답도 있겠다 싶다. 잘 모르는 내용을 섣불리 도전하면 상대방이 하는 영어는 무척 낯설기만 하다. 영어 자신감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문제다. 접시가 문제가 아니라 접시에 담긴 음식이 문제다.

그날의 소회는 나의 아이들에게로 대입된다. 오늘과 같은 일이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막아야 한다. 교직원의 애티튜드가 저러한데 이 학교의 선생님이나 많은 스태프들 또한 미덥지가 않았다. 나도 준비, 아이들도 준비, 준비만이 살 길이다 싶었다. 내 준비는 10년 전에 성공한 경험도 있고 하니 어찌 길을 잡아 나갈 수 있겠는데, 아이들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싶다. 남편에게 우는 소리 한 판 하고 나니 대책에 대한 고민이 떠오르고 맘도 조급해졌다.


방과 후 담당자는 그 후에도 수도 없이 마주쳤다. 물론 소심한 복수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을 호박씨가 아니다. 무례함엔 무례하게 복수할 테다. 흔히 국제학교 안에서는 일대일로 누군가와 마주치거나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눈인사하거나 , " Hello."라고 말한다. 야구 껌 같은 인간이 나타나면 나는 시선을 그 너머 한 점에 고정시켰다. 내 눈엔 그가 안 보이는 듯이 말이다. 그가 아무리 나를 쳐다봐도 내 초점 속엔 그는 없다. 없는 듯이 씩씩하게 그를 지나쳐 보는 거다. 소심하기 이를 때 없다고 할 수도, 그게 무슨 복수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해보시길 추천한다. 힐링된다.

후일 나의 이 소심한 복수에 맞장구 쳐준 1인이 있었기에 나는 이 담당자는 여러모로 고맙다. 본인의 네이티브 언어를 업으로 삼는 이가 갖춰야 할 소양에 대해 논하고, 그의 자질을 비난하는 보석 같은 이가 이 국제학교에는 있다. 곧 등장한다.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린다. 빛나는 그녀 덕분에 Frankfurt International School은 꽤나 괜찮은 학교로 결론 내릴 수 있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복도 많은 나다.


상대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낯선 상대를 바라봐야 하는 기회가 있다. 인정과 열림으로 가는 지름길은 소통이다. 영어는 그런 소통의 수단이다. 나의 유창한 영어는 나를 알리고 상대를 이해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나의 아이들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어는 독백용이 아닌 대화용이 때문이다. 영어 공부의 실체는 겸손함이다. 호박씨 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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