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진단을 하루 전에 받았다고 지인이 울먹인다. 진행속도가 빠르다는 의사의 말을 전하며 손수건으로 연신 찍어대는 눈물이 안쓰럽다. 검사를 더 진행하고 치료를 해나가겠지만 그동안 암환자들이 어떤 치료를 받고 신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는지 극단적인 경우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대뜸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진 그녀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버렸다. 부정적인 생각들로 소름이 끼쳐왔다.
주변에서 암을 극복했거나 수술 후 추적 관찰 중인 지인들의 따뜻한 위로의 말도 곱게 들리지 않고 ‘그건 당신의 시간인 거고. 다 잘된 경우인 거’라고 꼬장 부리는 마음이 순간 일었다.
무엇을 하든 적극적이고 정이 많던 그녀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떠오른다. 애정을 쏟았던 사람들 무엇보다 지금까지 건강하다 여기던 몸이겠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세 가지 금이 황금, 소금, 지금이라고, 물론 그중에 으뜸은 황금이나 소금으로 살 수 없는 지금이라는데.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제는 모르고 오늘은 안다는 것뿐. 알았으니 오히려 다행이고 치료를 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말씀을 모를 리 없는 그녀가 울고 있는 지금은, 내일 친구와 21년 만에 재개통한 교외선을 타고 장흥 일영을 갈 생각으로 하루 전부터 설레는 내 지금이 다를 터.
허리가 마비되어 휴대폰을 가지러 갈 수도 없는,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경험을 한 사람에게 서있어야 하는 30분은 노인주간보호센터에 들어가지 않고 소동을 피우는 엄마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이의 시간과 다를 터.
화려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우수수 땅에 떨어져 빗물에 뭉개지는 벚꽃 잎의 지금, 복숭아꽃은 하루가 다르게 봉오리를 터트리는 자연 순환의 시간.
치매로 시간에 갇혀버린 엄마가 잠을 잊고 방안을 서성거리는 지금도 다르다. 엄마는 불 꺼진 방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만져지는 물건을 이리저리 가닥없이 꺼냈다 들었다 놓았다 옮겼다를 반복한다. 정돈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엄마의 시간이다.
화장실 가면서 몇 번을 멈춰 서서 바닥에 보이는 것들을 위태하게 짚어 올리고 걸려있는 수건 내리고 그저 서있기도 한 엄마를 내내 부축하고 있는 나, 잠시 한눈팔면 찢어버리는 기저귀, 다시 입으려면 겉옷부터 벗고 다시 입어야 하는 더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나, 먹다가 던져버리는 음식들로 튀어 오른 파편들, 내 시간을 기준으로 하니 무료하고 답답하고 화가 날 뿐이다. 엄마의 시간을 무의미하다 여긴 건지도.
각자의 지금은 다르고 각자의 마음만큼이나 애틋할 테지.
때때로 기억하는 사실이지만 함부로 나의 지금으로 상대의 지금을 재단할 수 없는 이유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