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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치기 좋은 날입니다.

by 아생

2025년 추석 하루 전, 가을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전 부치기 좋은 날인데요

능소화 잎잎이 비를 받아내는 수다스러운 소리, 배수관을 타고 모인 빗물이 땅으로 굵게 떨어지는, 야트막한 뒷산에서 고구마밭으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깊게 파놓은 하수구로 급하게 낙하하는, 주차장 텐트가 받아내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들로 어우러진 빗소리 교향곡을 커피 향에 곁들여 음미하고 있습니다.

빗소리에 살짝 스쳐가는 기억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단독주택에 사는 재미랄까, 애써왔던 삶에 대한 보상의 시간이랄까 하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신혼 초 깔끔하게 정돈된 아파트에 살면서 남은 생은 산만하더라도 현관문을 여는 순간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으로 가리라하여 주택전세를 얻기로 했습니다.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기왕이면 전망 좋은 곳을 찾다가 정착한 게 북한산 자락에 있는 단독주택의 3층 전세였습니다. 산자락에 있다 보니 3층 앞마당에 텃밭이 있어 채소도 기르고 닭도 키우고 했었지요. 닭을 기를 수 있게 배려해 주신 임대인에게 지금까지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주택으로 이사한 후에 베란다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어린 시절 슬레이트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 받아 머리 감았던 때가 떠올라 세탁기에 넣어둔 빨랫감을 꺼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빨래를 했더랬습니다. 빨래터에 여인네들처럼.

생각해 보니 아파트에 사는 동안 땅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거실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겁니다. 몇십 년 잊었던 소리를 찾은 기분이랄까요.

빨래하기 딱 적당한 비가 내리고 있어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

또 하나, 명절 하면 귀성길 선물보따리가 생각나지요. 요즘은 붐비는 인천공항을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대학 합격증은 받아놨는데 등록금이 없어 부모님의 애를 태우다 엄마 손에 이끌려 찾아간 동네분에게 육십만원을 빌려 겨우 입학했습니다. 한동안 돈을 빌리는 궁색한 자리에 굳이 데려갔어야 했을까 의문이 있었는데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절박한 얼굴을 보여서라도 빌리고야 말겠다는 엄마의 의지였다는 걸 머리가 좀 더 큰 후에 알았습니다. 도움받아 마련한 4년이기에 시간을 더 아껴 썼는지도 모르고요.

첫여름방학 구로에 있는 식품회사에서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2교대로 돌아갔는데 저는 알바라 오전에 배정되었죠. 알바는 손이 부족한 팀으로 지원을 나가다 보니 어느 날은 만두, 또는 빵, 아이스크림, 라면 등등 매번 다른 일을 합니다. 부서마다 조장이 있어 그날 일을 설명해 주는데 컵라면 만드는 공정에 투입되던 날, 며칠 전 프레스에 팔이 잘린 직원이 있다, 프레스가 내려오기 전에 손을 빼야 한다는 주의를 듣고 몸이 얼어버렸습니다. 그리곤 바보가 아닌 이상 왜 프레스가 있는 곳까지 팔을 뻗나 당연히 미진하더라도 그전에 하던 일을 멈추지 했습니다. 다음날 오후 2시쯤 나른해지는 시간에 알아버렸습니다. 순간 졸았고 손은 프레스 바로 앞까지 스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했던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가 이해되는 순간이었죠. 하루 2교대로 돌아가는 격무에 아무리 젊다 해도 버티기 힘든 근무환경이니 어쩔 수 없이 몸이 무너지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근속기간 6년이라던 라면부의 조장은 저와 동갑이더군요.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 와서 바로 취업했던 겁니다. 불량이 나오면 점심도 거르고 기계를 손보고 부족한 작업량을 채우던 그녀의 귀성길이 문득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양손에 선물을 들고 고향을 찾았겠지요.

귀한 시간 긴 연휴 편안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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