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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들 하셨나요?

by 아생

“이틀만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중에서 유독 눈이 가는 구절입니다. 요즘 딱 제 마음입니다.

추석 지나 고구마를 캐려 하면 비가 오고 또 오고 해서 수확이 늦어지다 보니 고구마에 심이 단단히 박혀 망고마냥 절반이 버려지기도 했는데요.


고구마를 캘 때처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고구마 줄기를 쑥 뽑아 올리면 몇 개 달려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땅에 묻혀있죠. 놀이하듯 호미로 두둑한 흙을 옆면에서 살살 무너뜨리다 보면 한줄기를 타고 무리 지어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는 고구마를 맞이합니다. 한 지붕 아래 서로 의지하며 병충해를 견딘 찐 보랏빛 고구마 가족이 고동색 흙에 야무지게 자리하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올해는 무리 지어 있지 않고 드문드문 낱개로 발견합니다. 이 녀석들도 살기 힘들어 각자도생 한 모양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여물지 않아 맛도 밍밍해서 숙성기간을 거치면 괜찮아지려니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무지렁이 농사꾼은 날씨를 탓할밖에요.


배추 농사도 시원찮습니다. 속이 차지 않은 배추가 태반입니다. 상추 잎 너풀거리듯이 바람에 떨어진 능소화 잎을 가득 품고 사방으로 넓적하게만 자랍니다. 우리 집 배추만 그런 건 아니고 동네 배추밭에 푸릇한 것보다 누렇게 병든 잎이 더 많아 보이니 20년 지기 농사꾼들도 연이은 가을비에 별수 없었던 게죠.

집집이 배추가 시원찮으니 더 병들기 전에 뽑는다고 김장을 마친 집들이 여럿됩니다.

그런 중에도 포기당 2,3키로 나갈듯한 튼실한 배추를 지금까지 밭에 두고 있는 집이 있으니 언뜻 수영복을 입고 있는 배추를 상상하게 됩니다. 투자의 귀재 워런버핏이 수영장의 물이 빠지면 누가 수영복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한 말이 스치면서.


유독 가을비가 많았던 질퍽한 시간에도 뿌리와 잎을 단단히 키울 수 있던 건 기본기 때문이었을까요. 손쉽게 화학비료를 휙휙 뿌리는 대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땅심을 높인 덕일 거라 짐작합니다.

몇 개월이라도 땅에 쉼을 허락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추려 발효한 퇴비, 낙엽 퇴비, 빗물 퇴비, 채소 다듬은 찌꺼기도 모아 삭혀 퇴비로 사용하는 걸 오가며 봤기 때문입니다. 예사로 보았던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빛바랜 모자를 덜렁 쓰고 아침마다 밭으로 향하는 담담한 표정의 늙은 농부를 돌아보게 됩니다.

‘망양보뢰(亡羊補牢)’라는 말이 있지요. 양을 잃고 우리를 고친다. 즉 지금이라도 고치면 늦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요. 어떤 일이 잘못된 다음에 후회하고 뉘우쳐도 소용없다는 뜻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는 사뭇 뉘앙스가 다르죠.


저도 느낀 바 있어 냄새 때문에 포기했던 음식물 쓰레기 퇴비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밭 한켠에 퇴비장을 만들어 음식물 쓰레기를 그때그때 흙과 배합하니 냄새는 잡았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동면하던 땅이 봄 햇살에 허기진 배를 들어 올리면 그때 흡족히 뿌려 줄겁니다.

벌써부터 설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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