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온도
1화 이름의 온도
이야기의 시작은 다 비슷하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른 채 조심스럽게 혹은 아무렇지 않게 한 발을 내디딘다.
남편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불러온 사람은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다.
처음 그 이름을 입안에서 불러 본 기억이 난다. 아직 연애 초기였고,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어색해서 한참을 웃던 저녁이었다. 나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건 이상하게도 마음속 가장 깊은 방의 문을 여는 일 같아서, 한 번 부르고 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웃으며
“그냥 불러. 이름인데 뭐.”
그에게는 그저 이름이었는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었다. 나는 오래 망설임이고 그 순간 그의 세계가 내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 이름 하나를 중심으로 조금 기울어진 듯스며드는 일이었다. 그 뒤로 그 이름은 내게 사랑의 증거가 되었고, 생활의 리듬이 되었고, 화해의 말이 되었고, 기다림의 끝이 되었다.
부부가 되면 사랑은 거창한 고백보다도 더 사소한 것에 깃든다. 저녁 식탁 위에서 무심히 건네는 찻잔, 퇴근한 뒤 벗어둔 양말 한 짝, 아침마다 “다녀올게”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런 것들 사이에 사랑은 눅눅하게 스며든다.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천 번 그를 불렀을 것이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졸린 얼굴로, 다정한 웃음으로, 아이를 재운 뒤 지친 숨 사이로. 그 이름은 우리의 결혼생활이 지나온 시간만큼 낡고 익숙해졌고, 그래서 더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은 때때로 위험하다. 너무 오래 곁에 두고 있으면 그것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날 그녀가 내 앞에 앉기 전까지 나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전화를 받은 건 이틀 전이었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벨 소리가 조용한 일상 한가운데를 불쑥 파고들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물 묻은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이미 결심을 끝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정적 사이로 불길한 예감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꼭.”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끊은 뒤에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봤다. 물은 계속 틀어져 있었고 싱크대엔 거품이 쌓였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소설의 첫 장면 같기도 했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흔한 전개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흔한 일이 어째서 이렇게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남편은 그날도 평소처럼 퇴근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오늘 뭐 먹어?”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피곤해 보였고, 셔츠의 칼라는 조금 구겨져 있었고, 서류가방을 내려놓는 손도 늘 그랬듯 무심했다. 그가 다른 여자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원래 얼굴에 적혀 있지 않지, 나는 생각했다.
“왜 그렇게 봐?” 그가 물었다.
“그냥.”
그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의심은 확인되기 전까지는 부정할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낸 질문은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내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약속한 카페는 병원 뒤편 골목에 있었다. 평일 오후라 손님이 많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먼저 도착한 건 나였다. 물 한 잔을 앞에 두고, 들어오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누가 그녀일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젊을까. 어릴까. 예쁠까. 아니면 아주 평범해서 더 무서울까 하는 생각에 찻잔만 만지작 거리며 문소리에 촉각을 세웠다. 그 순간 문이 열렸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나는 단번에 알았다.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 단정했고, 더 차분했고, 무엇보다 너무 맑아 보였다. 얇은 회색 니트에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게 묶여 있었다. 눈이 맑았다. 누군가를 속이고 훔쳐왔다는 흔적이 전혀 없는 얼굴. 나는 그 맑음이 무서웠다.
죄책감이 보이지 않는 얼굴은 때로 노골적인 뻔뻔함보다 더 사람을 화나게 했다.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문을 묻는 직원에게 그녀는 따뜻한 차를 시켰다. 손끝이 가늘고 깨끗했다. 저 손이 내 남편의 얼굴을 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울렁거렸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목소리는 낮고 떨리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저… 남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 있던 세계의 일부가 아주 조용히 금이 갔다.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선명했다. 사람은 큰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조용히 마치 본래 그럴 운명이었다는 듯 금이 간다.
“얼마나 됐죠?”
내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1년 조금 넘었어요.”
1년. 나는 그 숫자를 속으로 굴려보았다. 1년이면 계절이 한 번 다 지나간 시간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아이의 학원 시간을 맞추고, 시어머니 생신 선물을 고르고, 보험료를 이체하고, 주말 장을 보고,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깼다.
그 모든 생활 위에 1년이라는 균열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었다.
“왜 저를 만나자고 했죠?”
그녀는 찻잔을 한 번 만지작거리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정리하였고, 정리되었는 줄 알았어요.”
“왜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는 거죠? 정리하셨다면서 제가 알기를 바랐나요 누구를 위한 정리인지 묻고 싶군요. 당신을 위해서? 아니면 제 남편을 위해서요?”
처음으로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저도… 끝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한 번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요.”
그녀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그 사람도...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요? 그 힘든 사람을 당신이 위로했고, 그러다 사랑이 됐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명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럼 뭐죠? 이해해 달라고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그들은 마지막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쪽에 남는 것은 끝이 아니었다. 무너진 신뢰, 변형된 기억, 이전과 같지 않을 이름의 온도. 그런 것들은 어디에도 쉽게 끝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내 안 어디선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분노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침범당한 자의 본능에 가까웠다. 저 이름은 내 오랜 시간의 끝에서 겨우 부드러워진 이름이었다. 아이가 아플 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이름이고, 막막한 청약통장을 같이 들여다보며 웃던 이름이고 새벽에 열이 나 병원으로 달려가며 불렀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이름을. 나와 같은 온도로 불렀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그 이름은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고. 나만이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야 한다고, 당신이 함부로 입술에 얹을 이름이 아니라고.’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내 안의 분노는 너무 커서 말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맑고 깨끗한 눈 나와 전혀 다른 얼굴. 그녀는 정말로 사랑했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흔히 생각하는 추잡함이나 뻔뻔함이 아니라 진심처럼 보여서 더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