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는 모녀가 있다?!
MBTI가 유행하기 전에는 엄마의 단호박 같은 면모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를 몰랐다. 밖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 마음이 앞서나가 감정적으로 늘어놓으면 엄마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말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의 입장을, 병원에서 일을 할 때는 환자의 입장을. 친구의 입장에 설 때는 나의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위해서였고 환자의 입장에 설 때는 아무래도 당신은 병원 가면 환자니까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적당히 서운할 때는 '엄마는 원래 저렇지.' 하고 입이 다물어지지만-사실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고 삐뚤어진 채로 다물어진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 역성부터 들어주면 참다 참다 소리를 질렀다.
"엄마 사이코패스지!"
눈앞에 있는 내 감정은 개코딱지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그러고는 내 외침을 무시하면서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해 주셨다. 요새 이수지 님이 유튜브에서 열연하시는 '제이미맘'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엄마가 기다려줄게. 우리 00 엄마랑 소통할 수 있겠어?' 한 번도 본 적 없다. 감정의 소통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엄마의 양육법이셨다.
내가 엄마의 성격을 하나도 안 닮았기 때문에 소통은 더욱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내 선천적인 성격은 아빠를 많이 닮았다. 일타쌍피를 해보자면 아빠와 나는 융통성이 없고 자기밖에 모른다. 남편이야 이미 성격 형성이 된 후 결혼을 했으니 뜯어고치지 못하고 산다고 쳐도 딸까지 아빠의 길을 걷게 할 수 없다고 엄마는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같은 학교에 다른 반인 사촌과 집이 가까워 등하교를 함께 했었다. 어느 날은 사촌이 짐을 무겁게 들고 하교하는데 그 옆에서 나는 도와주지도 않고 두 손 팔랑팔랑 가볍게 집으로 왔었다고 한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사촌은 이모한테 말했고 이모는 엄마에게 서운하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엄마는 기막히고 놀라서 나를 다그쳤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이 일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 이기적이라고 혼을 많이 냈고, 혼이난 행동들은 기억나는 게 대부분인데 이 일은 정말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은 안 나지만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큰 게 어느 날은 억울해져서 누구 한 명이 가운데서 거짓말한 거 아니냐고 엄마한테 다시 여쭤봤다.
아니, 내가 아무리 애기 때 이기적이었다고 해도 옆에서 낑낑대면서 들고 오는데 도와주겠다고 말 한마디도 안 해봤겠냐고 엄마가 잘못안거 아니냐고.
벌써 20년이 더 된 일이라 엄마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이모한테 전화를 받고 나한테 확인했을 때 내가 잘못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 부분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하셨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 해도 떠오르는 게 없으니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한다. 확실한 건 내가 그때 사건을 떠올리면서도 마음이 무겁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옛날엔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있다는 걸 대중들이 모르길 망정이지 지금 엄마가 날 키우고 있으면 분명 의심했을 것 같다. 내가 사이코패스를 낳았나 하고. 엄마는 어린 나를 키우며 애 감정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여겼을 테고 나는 다 자라서 엄마한테 사이코패스냐고 소리 지른다. 그냥 쌤쌤인 듯하다.
번외) 한번 내 성격을 감안하고 그때 상황을 유추해 봤다. 아마 나는 짐이 무거워 보이니 들어줄까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사촌은 한 번은 괜찮다고 사양했을 것 같다. 그러면 조금 더 걷다가 재차 들어줄까냐고 내가 물어보고 그래 고마워하고 같이 들고 왔으면 그 사달이 안 났다. 그런데 내가 그 사양을 곧이곧대로 듣고 지 한 몸 가볍게 집에 와버렸고. 그러니 나는 물어봤으니까 미안하지가 않은 거다.
아마 저런 사연이 숨어있지 않았을까 싶다. 세 번은 물어보는 게 한국인의 정인데 내가 그렇게 혼나고 컸어도 지금도 두 번 세 번 누구한테 권하는 걸 귀찮고 어려워하는 걸 보면.
아니면 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