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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 ,한번의 이혼

사랑을 받는다는 건 세상에서 나에겐 가장 어려웠던 일

by Jihyun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는 노란 집에서 1남1녀로 태어났다. 그때의 기억은 없으나 늘 엄마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이야기들로 시작해보려 한다.


모든 일에 금방 싫증을 내고 버럭버럭 화를 내며

당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자식은 안중에도 없는 아버지와

자식들을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엄마.


늘 싸우는 소리에 무감각해지고 아빠는 이런 사람이다 너희를 버리려고 했다 너는 아빠를 닮아 너 밖에 모른다 등 늘 감정 쓰레기 통이 되어 버린 딸

아들은 어렵고 귀해서 뭐든 말 못 하고 식사 때도 생선 살이며 새우며 다 까서 밥에 올려주며 ‘넌 외가를 많이 닮았어 ‘라는 말만 했었더랬다


그렇게 대학을 가고 졸업 후에 오빠가 대기업에 취직을 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엄마였고 엄마의 상장과 같은 존재였고 나는 그냥 딸 70년대 태어난 딸이었다


엄마의 감정쓰레기 통이 되어 늘 받아들이고 아빠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뱉어내기 바빴다.


서울에 있는 2년제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사랑을 받기 위해 엄마에게 매 월급 때마다 선물을 사드리곤 했었다.나에게 혹여나 관심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래 난 딸이니까 … 오빠가 당연히 모든 걸 받는 게 맞지…‘라고 늘 생각이 남아 있었다 .

월급 쥐꼬리 만큼 받는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엄마는 매달 생활비까지 요구하셨었다

오빠에겐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그래서 난 늘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 되어 자존감도 없고 관심에 목말라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남자가 있었고 그때 당시에는 “빨리 관심과 사랑을 받고 살고 싶다”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생활이 온전한 삶의 일부분이 되었을까? 당연하게도 나의 삶에서 지우고 싶은 상처로 남아 흉터가 되어 볼 때마다 힘들다.


이 사람은 지방에서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모자란 것 없이 자랐고 결혼할 때도 아버님이 집을 해주셨었다. 이 사람은 막내라서 큰형보다 재산을 적게 받을까 봐 돈에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발짝 버튼은 돈인 사람이었다.

나의 부모가 힘이 없다 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재산이며 혹은 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적다는 걸. 결혼 후 나를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집 전화벨이 3번 울린 후에 전화를 받으면 그날은 욕을 먹는 날이고 심지어 벗어놓은 속옷을 몰래 검사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내 부모에게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지금 이 괴로움 보다 컸고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이혼녀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닐 터라 참아야만 했다.

임신을 하고 나서도 태교? 하…. 항상 조마조마 화낼까 봐 무서운 하루하루를 지냈고 남편이 혼자 직장 다니는 게 눈치가 보여 주말마다 만삭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아이를 낳고 태교 영향일까? 한 번도 흔히 말하는 100일의 기적도 4살까지 통잠이란 것도 나에겐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가던 날 아침 씻으러 화장실을 가는데 웬 남자가 거실에 잠을 자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남편에게 누구냐 물으니 친구라며 ‘그럼 어제 미리 전화를 해주지’라는 말에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내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것에 왜 말해야 하냐며 자신의 친구 앞에서 온갖 욕을 나에게 다 퍼부었다.

그때 나의 마음이란… 뭐라고 설명하기에도 어려운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섞여 눈물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되던 때는 나에게 아이를 안겨주면 이혼하자고 …. 그렇게 갓난아이를 안고 갈 곳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그렇게 서럽게 울었더랬다. 20대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어리석었었다. 그게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기 위한 무기였다는 걸 난 몰랐다.

그렇게 온갖 감정을 나에게 퍼붓고 나면 울면서 나에게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며 사과하기 바빴고 아이가 돌 무렵 갑자기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하루하루 생활비 걱정을 해야 했다.

그래서 아이의 분유값을 벌기 위해 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딱 저녁 8시에 현관문을 열지 않으면 또 싸움이 되고 내가 출근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퇴근할 때는 직장 건너편에서 누구랑 나오는지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싸우기 싫어서 지하철 놓칠까 매일 뛰어다니고 그렇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이 씻기고 재우고 하루하루 아무 생각 없이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남편도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매달 월급날 나의 월급을 다 주지 않으면 그날을 또 욕을 먹고 폭력과 의처증에 나는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왜 살아가는지 남들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데 난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내가 부모에게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나의 아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줄 여력조차 없이 살게 되었다 성폭행 못지않은 행위에 나는 혹여 아이가 생길까 봐 병원에 가서 피임을 하고 매일 밤이 무서워 남편 문소리만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욱하는 성질에 나에게 가위를 던져 안방 유리가 깨지는 사건이 생겼다 문득 ‘이젠 따귀 손찌검이 아니라 이젠 나는 죽겠다… 곧’ 유리가 우두득 금 가는 소리에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는 사랑 따윈 받을 수 없는 팔자인가 보다라고….

상의 한마디도 없이 이사 가야 하니 돈을 달라길래 매달 생활비로 쓰고 남은 돈 모아둔 돈을 모두 건넸다

남편의 월급은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그리곤 매번 이혼이라는 무기로 날 괴롭히던 사람에게 내가 이혼이라는 무기를 목에 가누게 되었다


그때 내 통장에 잔고 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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