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품되어 돌아온 딸 그리고 엄마
이혼을 하고 친정집에 머물게 되었다.
엄마는 내 목소리 행동만 보아도 엄마이기에 내가 힘들었다는 걸 아셨을 것이다. 결혼해서도 명절 한번 친정에 가지 못했고 늘 명절 2주 전 차 밀린다며 30분 방문이 전부였다. 명절기간과 휴가는 시댁에서 보냈다. 남편과 싸우기 싫었다.
엄마는 서운한 마음이 컸을 텐데도 싸울까 봐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혼할 수 있어라고 하셨지만 한편으론 주변 시선으로 부끄러운 듯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은 커다란 바위가 누르는 듯 무거웠고 힘겨웠다.
다시 일어서야 하기에 난 다시 직장으로 나가야 했고
결혼생활동안 잘 만나지 못한 미안함으로 엄마에게 더 잘하려 노력했고 퇴근길에 엄마와 단둘이 외식도 하고
그렇게 텅 비어버린 나의 마음을 엄마로 채우기 시작했다.
엄마들은 키울 때는 아들 아들 하며 애지중지 키우시다가 아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어려운 사이가 되는 게 일반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그랬다.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은 한편으론 원망스럽고 또 한편으론 사랑했다. 살아온 시간을 알기에 이해하면서도 또 전부를 이해하진 못했기에 원망했던 것 같다.
아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 혹은 아들 때문에 속상했던 일을 나에게 말하기 시작하면서 서른이 넘었던 나를 통금시간을 정하고 ‘돈‘을 요구 하기 시작했다. 아들에겐 말하지 못하면서…..
‘ㅇㅇ네 딸이 생활비로 200만 원을 준데’
‘ㅇㅇ네 딸이 엄마 여행 간다고 100만 원을 줬다더라’
‘글쎄 그 친구는 무슨 덕인지 딸이 ~~~~’
하…. 나 빈통장으로 이혼했기에 나도 경제적으로 힘든 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엄마는 노후는 준비해 좋은 상태였지만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던 것 같다.
정작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못하면서 나에게 서슴없이 돈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혼 후에도 나는 ‘돈’이라는 울타리에서 또 챗바퀴를 돌아야 했다.
급여를 타고 엄마에게 생활비를 드리고 남는 돈은 고작 50만 원.
‘엄마 나 돈을 모아야 나중에 아이가 커서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어. 그리고 나도 집을 사야지 이렇게 살 수는 없어!‘라고 말을 했지만
엄마는 ’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 힘들던 시절에 먹이고 입히고 너희 오빠는 결혼했다고 자기 가정만 챙기고 엄마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 ‘
내가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어?
이 말이 나의 목구멍에서 울렁거렸다.
2년간 내가 준 돈으로 지인에게 이자받는다고 빌려주고 그 지인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게 사건이 터지고 이 사건으로 엄마와 떨어져 살기로 했다.
대학 졸업하고 초봉얼마 되지 않았던 돈으로 자취하며 돈 모아 살다가 결혼하고 결혼해서 돈 벌어 다 주고
이혼해서 또 엄마에게 주고 다시 난 0원의 잔액으로 친정을 나오게 된 것이다.
엄마를 원망하진 않았다
그 시대는 그럴 수 있었으니 힘든 시기에 키웠으니 보상심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난 딸이니 편해서 남편과 아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감정 쓰레기통이 될 수 있었으며 또 남편에게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면
자식에게 집착을 하며 사랑을 퍼주고 지나친 관심으로 빈 공간을 채우려 하는 것 같다.
그런 엄마를 알기에 한편에는 엄마가 불쌍했다
평생 외롭게 살아온 엄마라서….
전 남편 또한 자라면서 부모가 바빠서 내면에 채우지 못했던 감정을 나에게서 채우려 지나치게 집착하고 의심하며 날 조여왔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모든 만물이 조이면 조이는 대로 성장을 하는 게 하니라 조이는 끈이 끊어지고 만다. 나의 결혼생활이 그랬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그 틀에 맞춰 살다가 내가 병들고 힘들어 끝내 끈을 끊어 내고 나왔다. 사랑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어떻게 사랑을 하는 건지 또는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관심을 받으면 어찌할지 모르고 때론 사랑을 갈구하다가 섣부른 선택으로 인해 더 큰 시련을 겪은 것이다.
난 흔히 말하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매일 싸우는 소리와 늘 바쁜 엄마, 아빠는 자기만 생각하며 자식들이 빵이라도 먹을까 싶어 숨겨두기 바쁜 그런 사람이었다. 난 외부자극에 상당하게 예민한 사람이고 주변 사람들 평가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도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못하고 혼자 끙끙대며 일을 할 때도 강박증에 시달렸으며 약속시간도 늘 30분 먼저 도착해야 안심하는 그런 인간이다.
상대방이 그냥 하는 말에도 난 그 말을 몇십 번 곱씹어 생각을 하고 스스로 자책을 하고 거절도 잘 못하는 그런 인간. 사랑받지 못할까 봐 그러지 않았을까?
몇 해 전 엄마가 돌아가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엄마가 아닌 여자의 삶을 살아온 엄마가 불쌍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느낀 건 내가 마흔이 되었을 때부터
엄마와 단둘이 여행도 했었다는 거 남들에게 자랑하는 거 좋아하는 엄마에게 뭐라도 해드렸다는 거
돌아가신 후에 죄책감과 미안함이 덜 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아빠는 갑자기 엄마를 잃은 자식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을 신경 안 써준다며 툴툴거렸다.
아내를 먼저 보낸 슬픔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엿볼 수 없었다. 나의 아빠는 그런 사람이다.
염하던 날 ‘다음 생에는 아빠 같은 사람 말고 엄마를 사랑해 주고 아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나 알았지?‘하고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다. 아빠 앞에서 ….
나의 생물학적 서류상의 아빠
아빠 역시 자라온 환경이 그랬기에 보고 느끼고 배운 게 없어서 자식, 배우자를 때리고 욕하고 그랬겠지. 딸이 그렇게 맞고 살아도 사위 불러다 한마디도 안 하는 그런 사람. 자신이 감기만 걸려도 일부러 따라다니며 기침소리 내고 ‘아이고아이고‘ 엄살 부리며 세네 살 아이들 만도 못한 어른으로 산 것이다.
부모라는 이유로 대접만 받으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만 딱 거기 까지만 하게 된다.
나의 첫 결혼도 내가 자라온 환경, 낮은 자존감, 기댈 곳 없던 …그래서 참아야 한다라고만 생각했다.
사랑받기 위해 나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고 맞춰가며 살다가 끝내 나는 우울증이라는 바다에 빠져 살고
더 깊게 더 깊게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30대는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