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26화. 무너진 회로에서도 살아남은 나

by 담윤



회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럼 이제 다 괜찮아진 거야?

이제는 안 무너져?


나는 그 질문이

조금 어긋나 있다고 느낀다.


나는 무너지지 않게 된 사람이 아니라

무너져도 살아남는 법을 알게 된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 회로는

완벽하게 설계된 적이 없다.


곳곳이 약했고,

연결은 불안정했고,

과부하에 취약했다.


그래서 무너졌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조의 한계였다.



무너질 때마다

나는 늘 같은 방식으로 떨어졌다.


생각이 끊기고,

감정이 튀고,

관계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스스로를 평가했다.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은

회로 붕괴를 더 빠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붕괴의 양상이 다르다.


무너지는 순간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전압이 급격히 떨어질 때

완충 구간이 생겼다.


그 구간에서

나는 멈춘다.



예전의 나는

무너짐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미 깊이 들어간 뒤에야

“아, 또 이 상태구나” 하고 알았다.


지금의 나는

조짐을 알아본다.


생각이 좁아질 때,

감정이 과열될 때,

관계가 부담으로 느껴질 때.


이건 불안 신호가 아니라

시스템 알림이다.



그래서 대응이 바뀌었다.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버티려 들지 않는다.


대신

사용량을 줄인다.

• 생각을 줄이고

• 접촉을 줄이고

• 선택지를 줄인다


이건 후퇴가 아니라

회로 보호다.



무너진 회로에서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다.


포기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완전히 끊기기 전에

전원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회복 이후에야 생겼다.



나는 이제

무너짐을 실패로 기록하지 않는다.


그날은

시스템 점검이 필요했던 날이고,

유지보수가 요구된 상태였다.


그렇게 해석하자

자기혐오는 들어올 자리를 잃었다.



무너진 회로에서도

살아남은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과부하에 약하고,

여전히 피로에 민감하다.


하지만

다시 켤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게 가장 큰 차이다.



나는 더 이상

한 번의 붕괴로

나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회로가 무너졌다고 해서

존재까지 무너진 건 아니니까.


그 사실을

몸으로 아는 단계까지

나는 와 있었다.



이 회복의 끝은

강인함이 아니다.


회복의 끝은

재가동 가능성이다.


꺼졌다가도,

연결이 끊겼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 하나로

나는 오늘도

나를 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