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고싶다.
좋은 게 좋은거고, 별 생각도 고민도 없이
너무 많은 걸 눈에 담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다른 이들의 별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의미부여를 할 때도 있고, 그로인해 온종일 신경이 쓰이곤 한다.
종종 상대의 의중을 넘겨짚고는 오해해서 마음의 거리를 둘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환기를 해야한다.
운동을 하거나, 주위 정리를 하거나, 미뤄뒀던 집안일을 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는 주로 운동을 한다.
찌뿌둥했던 몸이 짜릿하니 상쾌해지고, 혈액순환이 되면서 이전에 왜 기분이 안좋았는지마저 잊힐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밀린 집안일 혹은 주변 정리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건 차치해두고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할 에너지조차 없을 때는 이렇게 퍼지고는 한다.
한참을 늘어져있다 보면 이대로 나를 방치해둬선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다독일 방법을 찾는다.
이렇게 저렇게 어찌저찌 해내고는 있지만, 좀 더 편해지고싶다.
대체 어디서 기인했을까? 고민을 하며 나의 지난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끝이 없다.
원인을 알게 되면 과연 해결이 되는걸까 싶기도 하고,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얼굴에 난 뾰루지에 집중하다 보면, 거울을 볼 때 그곳만 보인다.
마치 내 안의 속시끄러운 문제들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싶다.
잠시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 이내 해결이 되어있을 수 있다.
뾰루지는 이내 들어가고는 하니까...
사랑을 받아도 모자른 느낌이다. 오히려 갈증에 물을 마시면 더 목이 타듯이.
몸에 커다란 구멍이 난듯 채워지지가 않는다.
결핍은 단기적으로는 높은 성과를 낸다고 한다.
나의 결핍은 '수용'인 듯 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혹은 주위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알아서 잘 해냈을 때다.
받아쓰기를 다 맞았을 때, 성적이 높았을 때, 상을 받았을 때, 동생들을 잘 돌보았을 때 등...
아버지는 응석부리는 걸 싫어하셨다. '첫째가 되어서', '장녀가 야무진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나는 알아서 잘 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센스있고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보니 눈치가 빨라졌고, 필요한 상황에 필요해보이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는 사회생활에서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게 '독'이지 않았을까?
종종 내가 할 수 있는 이상을 하려고 무리를 했고, 무리를 한 후 내게 그만큼의 성과 혹은 인정 등이 없었을 때는 무척이나 공허하고 쓸쓸해졌다.
또한 그 시간들은 '알아서 잘'이 내 판단 줏대가 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상황에선 당연히 이렇게 해야되지 않나?'
'왜 나는 네가 신경쓰이지 않게 알아서 하는데, 너는 아니야?'
서운함과 속상함은 종종 분노라는 다른 가면 뒤에 숨곤 했다.
약한 마음을 악한 마음 뒤에 숨겼다.
나는 지금 유년기로 회귀한 듯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지가 않다
아이유가 자기애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제가 생각하는 자기애란 그냥 내가 나를 인정하는 거예요.
이게 막 내가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정하고
그냥 나를 잘 이해하는게 자기애라고 생각해요. 제가 너무 예뻐서 제가 좋은 것도 아니고, 너무 잘해서 제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저는 막 진짜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내가 나를 아는 만큼, 그냥 나는 요만한 사람이니까 실망할 일도 없고. 그냥 나는 내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 그 마음 후부터는 그냥 너무 편해졌어요"
나는 여리고, 정이 많고, 상처를 잘 받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사소한 일에 기쁘고 즐거운 건 긍정하지만, 작은 일에 마음이 상하고 흔들리는 건 부정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나만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아무도 못보게 꼭꼭 숨겨놓는다 해서, 그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억눌린 마음은 모나고 모나져 엉뚱한 곳에서 터져버리곤 한다.
내가 요만한 사람인 걸 인정하는 것.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