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이상한 고집을 피워보고 싶다. 자기 객관화라는 명분으로 나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자들을 볼 때마다 환멸이 난다. 과연 그렇게 잘났다던 그들의 시야는 얼마나 넓겠는가? 특히 한국은 나르시시즘을 미칠 듯이 경멸하는 것 같다. 누군가 잘난척하거나 독단적인 성향이라도 보이면 엄청나고 극렬한 히스테리성 반응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자칭 심리전문가들이 우후죽순 나와서 과학적 근거도 없는 상투적인 내용들을 실토하며 "현실에서 멀리해야 될 사람"으로 통칭해 버린다. 멀리해야 될 사람 즉, 배척해야 될 부류를 의미한다. 그런 뜻이라면 누구나 존중받지 못한다. 각자의 일면을 선별적으로 나눈다면 해당되지 않는 인격이란 없다. 워낙 개인주의적 가치를 혐오하는 정서가 지배하는 만큼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심리학적인 개념으로 착각한다. 사실 전문용어는 아니다. 원래 나르시시즘은 심리학적 소견에 따른 파편화된 증상일 뿐이다. 적어도 한국사회는 개인주의나 자아실현에 대한 정형화된 관점이 미비한 것 같다. 오히려 왜곡된 개인주의와 편향된 자아실현만 존재할뿐이다. 그리고 그걸 서구식 관점으로 치환한다. 마치 현대의 거대한 기류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한국식 모더니즘이 팽배하다. 어차피 외부에서 들여온 가치체계는 문화에 의해 오염되거나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통적 질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로써는 올바른 개인주의의 선례가 무엇인지를 판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자존감이 높은 누군가를 잘난 척, 고집, 자만심으로 치부함으로써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가 한국에 등장했다. 한국에서 나르시시즘은 비정형적이고, 반동적인 가치관으로 보이지만, 서양에서는 지극히 인격 스팩트럼에 포함되는 성향의 일환으로 존중해 준다. 그냥 그건 서양에서 일반 용어로써 누군가의 성격을 지칭할 뿐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겉치레로 서구양식을 모방해 놓고 그것을 본원적 가치로 종종 착각한다. 물론 이것은 각 나라의 전통적 질서가 서구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국가 내의 구성원의 정서적인 한계점에 직면하여 더 이상 문화가 융화되는 쪽으로 개진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종의 보편적 "충족성"을 그 국가의 개개인들이 사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충족성은 "서양문화를 완벽하게 받아들였다"라는 결론을 내리게끔 한다. 그렇기에 서양 문화나 트렌드가 정형화에 도달했는지의 여부에 있어서 명확한 외재적인 구별이 불가능해진다.
특히 요즘 레드필, 알파남, 인생 해커, 갓생 같은 이러한 내용들이 즐비하며, 주로 젊은 층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주고 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허황된 위로를 어떠한 이념아래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이런 모습 들은 현대의 삶에 어떠한 방법의 활로가 폐쇄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념의 선구자라도 된 거처럼 기존에 있는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영민해졌다는 망상이나 졸도에 빠진다. 정말 어리석은 인생의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레드필을 추종하면서 알파남을 선망하는 몇몇의 남성들은 그들 스스로 독립적인 판단 양식을 사유하고 있고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남성들은 자기 삶의 어두운 일면을 밝혀줄 마인드셋으로 규정하려는 태도마저 보이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온갖 혐오와 불만들을 자아내며 관련도 없는 여성들을 동물에 비유하거나 조롱하는 걸 보면 어리석고 상당히 불쾌하다. 그리고 그런 레드필 이론을 주창하면서도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회인들을 "선동당하는" "순응하는"이라는 수식어들을 붙인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개방적인 사고" "자유로운" 존재로써 자아도취에 빠지는 건 오히려 그들이 창발 한 헤게모니에 속박돼있는 걸 역설한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인건 이런 논지를 보면 절대적인 진리다. 특히 인간의 가치관이나 어떠한 틀은 동요되기도 하며 완강해지기도 한다. 아니, 적어도 이 두가지 사이를 교차하며 생각이나 관습은 전환된다. 생각이 굳혀지고 완강해진다는것에서 개입되는 간접 정념을 살펴본다면, 무언가를 향한 강한 신뢰이다. 그러한 신뢰는 개인의 생각을 고무시키기도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또다른 적절한 믿음이 부족한것이다. 즉, 무언가를 강하게 믿는것은 또다른 믿음에대한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내재하기때문이다. 예를들면 나도 이러한 비평 글을 쓰면써 감정에 따라 이성을 증축하려하지만 쓰면 쓸수롱 이성 그 자체를 따라가는걸 종종 느낀다. 감정대로 자유자재로 문장력을 발휘할수있는 찰나에 문장이나 텍스트 맥락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내용을 창출할수있게끔한다. 이것또한 글에 대한 내 문장(이성)이 완강해지는 순간은 감정에 대한 필요성을 상실한것이다.
두번째로는 가치관이 동요한다, 주관이 없다는것의 간접 정념에서는, 모든것을 깊고 신중하게 고려해야될 잠재적 의지가 발현되었기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주장이나 생각이 쉽게 흔들리는걸 보면 근거의 토대나 주관이 너무 미약하다고 보는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의 내면은 굉장히 입체적이다. 고집이 강한 누군가를 향해서 "비타협주의"를 논하기전에 무엇에 관해 어떤 메커니즘으로 신뢰를 하는지로 틀을 깨고 접근해야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들만의 고립된 창조적 불능은 나름대로 요긴한 설득력을 얻는다. 아니, 그들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존중응 내비쳐도 그들은 실리보다 당신의 존중에 매우 감사할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그런 수많은 레드필같은 극단적인 헤게모니들이 청년들의 입김속에 방출되고있다. 그러나 그런 관점지향적인 자세는 그 무엇도 인생에 기여를 하지않는다. 차라리 반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않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게 더 효과적일지도모른다. 레드필같은 대중들의 우상화는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종교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종교는 내면을 정화하여 세상에 비관적인 요소들이 종교나 신앙적 대상에게 예속됨을 인정하는 과정에서는 매우 심도깊은 철학이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온갖 잡다한 불만들을 끌어다가모은것, 특히 레드필 가치관이나 알파남 추종, 정치적 색채 갈등을 총 망라하는 그런 관념들은 자기 책망에 찌들려서 그걸 사회구성원을 향한 비난으로 점철되는건 감히 종교에 비견될수도 없다. 충분히 건전한 삶을 영위할수있는 지혜나 지식은 얼마든지 접할기회를 제공한다. 문제는, 건전한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각 개인의 소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뿐이다.
이것과 더불어서, 요즘 윤루카스라는 사이비 경제 유튜버가 2주전만 했어도 활개를 쳤었다. 그는 스스로 레드필을 추종하고싶은 사람이라며 멋쩍은 웃음과 함께 자처한다. 확고한 지식도 없으면서 쉽게 경제를 논평하다가 유튜브에 "쉽게 경제를 가르치는 남자"라는 베너를 최근에 지운걸보면 얼마나 본인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을지 체감이 된다. 최근 8월달에 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비판이 쇄도하는중에 지금까지 잠적했다. 윤루카스는 잘못된 내용들을 설파한게 엄청 많아서 실제로 그로인해 금전적인 피해를 봤던 사람도 생겨났다. 그렇게까지 악랄하고 영악한 그의 자태를 보고있자니,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가 상점에 장난감을 훔쳐서 변명하는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런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이렇게 부르짖는다.
"엄마 아빠, 난 단지 실수로 장난감을 훔쳤어" 본능만 쫒는 어린아이에게는 모든것이 실수이다. 그리고 윤루카스에게는 잘못된 내용을 전달해놓고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애원하듯이 사회를 향해 변명한다.
바로 이렇게 "여러분, 저는 경제를 완전히 모릅니다". 미흡하고 왜곡된 정보를 뻔뻔하게 전달해놓고 후처리 수습을 하기위해 그것에 관해 모른다 라는 결과론적인 상술을 쓰며 그는 종종 헛소리를 자주했었다. 그래놓고, 7월에 그는 "차가운 자본주의" 라는 책 한권을 내놓고는, 100장 남짓한 페이지에 써놓은 내용들이 죄다 경제학자들이 써놓은 내용만 각주하여 밑에 터무늬없는 자신의 소감만 간략히 옮겨적은 수준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것은 그렇게 터무늬없는 책의 가격이 만7천원이나 한다. 그러나 책은 이제 더 이상 구매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집이 때로는 타인에게 정당화하려는 효과가 발생한다. 나 자신의 생각이나 내면이 고양되어있다면 만인을 상대로 강요를 하거나 합리화를 시도한다. 그것의 발단은 "지적 우월감"이다. 사람은 똑똑하거나 언변이 좋거나 실력이 중요한건 아니다. 똘똘하고 현명한것, 그리고 상황에따라 적절한 대화를 할수있는 지혜로움이 요구된다. 그런 사람은 내면의 고집이 강하더라도 맨 위에 설명했다시피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고집"이 된다. 존경받는 고집을 가진 사람은 독선적이고 투쟁적인 사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화통하고 능수능란하게 자기주장의 영역을 재고할수있는 사람을 말한다.
모르는것은 모른다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것이 미덕이다. 윤루카스처럼 안량한 자격지심하나로 엉뚱하고 어설픈 항변을 하며 사람들에게 피해를주고 수치스러워지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것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공감대에 맞춰서 소통하려는 슬기로움이 필요하다. 특히나 요즘은 "개성"을 중요시한다. 경쟁이 복잡해줄수록 새로운 경쟁수단, 파이를 확보해야하기때문이다. 각자만의 전문성을 계발하는 도중에서는 지적 우월감이 발현될수있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의 재능이 타인으로하여금 능력차원의 불가입성을 관철힘으로써 자조적인 정체성을 지키고자하는 의도도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넘어서 타인의 가치를 침잠시키거나 경시하는 행태가 문제될뿐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일원화된 자기 세계가 존재하는만큼 고찰해야할 안건들은 영구적으로 생겨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