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흉악범죄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세상이 마치 범죄로 뒤덮여서 불안감을 조성하는듯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최근에 끔찍한 범죄가 터진 이후로 많은 국민들의 인식이 격동하고있다. 그리고 강한 경찰력과 더불어서 법적 처벌을 무겁게하자는 여론과 함께 사형제가 거론되었고, 한동훈 장관은 사형장을 시찰하고 점검하기도 했다. 물론 잔인한 범죄는 사라져야하며, 개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건 분명하지만, 사형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수가없다. 범죄는 처벌이 두려워서 행하지않는게 아니라, 즉자적인 감정 해소 혹은 상황에 따른 심리적 경향성이 범죄로 이어지며 차후에 물리력 및 법적 처벌을 피하기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것이 범죄자의 심리이다. 범죄는 개인의 사적인 동기에 의해 발현된 이후에만 처벌 가능성을 인지하는것뿐이기에, 처벌강화 또는 사형제는 선점적인 역할을 못할뿐더러, 오히려 범죄자의 입장에서의 증거인멸 및 회피 의도만 부추긴다. 중요한건 사형제는 단순히 잘못과 책임을 피력하는 주권인에게 행해지는 댓가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그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가 무엇이냐는것에 안건이다. 그 주체란 바로 국가 공권력이다. 과연 합법적일까? 일단 그건 매우 합법적이다. 왜냐면 법치주의에 의거한 계약을 활성화하여 개인이 잠정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간주하기때문이다. 그러나 공화정 역사 이래로, 단 한번도 개개인에게 사적인 입장이나 자연적 존재(인간)을 반영한적이 없다. 미국은 공화국이 창건되면서 계약 문서따위로 자연권을 통칭하였으며, 그 어떤 인간 본연의 심리적 발원점을 무시하고는 형식적인 문구나 텍스트 하나로만 헌법에 기입했다. 바로 헌법에 예속된 "인권"이다. 사실 인권은 너무나도 좋아보이고 긍휼적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인권은 개인의 원초적 자율성, 의도, 욕망 이러한 모든 본원적이고 생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을 부정하며, 오직 계약적 권력(공화정 헌법)의 명령하에서만 양도되어서 시민,국민,존엄성,자연인으로만 회부된다.인권이 있고 주권재민이 성립된다한들, 그건 항상 국가의 형틀의 범위 내에서만 재고되어왔다. 사실상 "보이지않는 봉건제"나 다름없다. 봉건제도 농노들의 목숨을 외부 침략자들로 보호해주는 댓가로 영주의 권한을 확장해나갔다. 그리고 농노들은 절대로 반항할수있는 명분따윈 없었다. 왜냐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입장에서는 영주에게의 저항은 정말로 모순적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역사를 보며 객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저땐 옛날이군, 참 무식했어, 그러나 현대는 달라" 라고..
웃긴건, 지금도 동일한 양식을 재생산,및 반복 중이다. 민주주의라는 보호 질서아래, 개인이 자유의 불편함을 느낀다면 민주주의라는 범위를 벗어날수조차없다. 자유론적인 결함이 발생했다한들, 모든 수단이나 가치를 오직 이미 증축된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만 발군해야한다는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독단적이고 고유한 개인의 정체성은 민주주의라는 진행적 체계에서만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진행적 체계란 무슨뜻일까? 불만이 있어도 불만을 호도되어지는 과정이 민주주의라며 유일하게 정당화한다는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오염되어간다. 개인의 순수한 자연 의지의 확장이 아니라 신분이나 자본계급을 반영하는 이권 팽창에서만 천착되어있는것이 오늘날 참혹하고 저열한 "자유주의 국가" 라고 불리는 추태이다. 사실 이건 민주주의를 배척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것처럼 오해받기 쉽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적 의제는 개인들의 냉전주의 헤게모니 철학이 지배하는만큼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고유양식", 혹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고유양식" 이런건 존재하지않는다. 민주주의를 지적하거 비판하면 민주주의가 아닌 외부의 것으로 취급된다. 외부의 것, 즉, 대립하고있는 형질이다. 각자 반대해서 새로운 이념을 창발하는게 아니라 오로지 좌익이냐 우익이냐로 양분할된다는것이다. 이건 개인의 무지도 아니고 집단의 어리석음도 아니다. 가장 명백한건, 봉건제도나 왕정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진후 공리적 가치를 양산했으며 그러한 공리적 틀에서의 인간 의지를 고찰하게 됨에따라 르네상스를 대표하게 되었다. 신이 아니라 "인간중심" 여기서 여태까지의 정치적 갈등을 표상할수있는 모종의 개념이 탄생한다. 인간 중심은 나중에 욕망으로 귀결되며 욕망은 상업적자유, 상업이 번창하면 노동의 자유(사실 이건 자유가 아니다) 그 이후에는 자본주의로 나아가며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질서 즉, 사회적 혁명이 대두되며 여러가지의 변증법적인 절차를 거친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현상은 일률적이라는 한계점을 지닌다. 너무나도 직선적이고 연속적이라서 좌 우익이라는 거대 양론 외에는 어떠한 체계도 인간의 머릿속으로 창안하지도, 계발할수도없다. 역사에서 변증법은 오직 하나의 과정에서 가역적인 개조가 진행되었기때문에 오직 상위개념이 선취점으로써 책정된 이후에 하위개념으로만 흩어지는 원리이기때문이다. 공리적 통찰이 없었다면 좌우익이 아니라 새로운 거버넌스를 창조했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아니 봉건제도 없었다는 가정까지 해야할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역사를 가정하기에는 인간에게 내재된 생물학적인 원리(탐욕, 이기심)마저도 부정해야할 판이기에 이쯤에서 접어두자. 이제 오늘날은 정치철학적인 스팩트럼이 매우 단조로워졌다. 과거에는 지식이 발견되지못한만큼 미분화되어있고 개체화된 개인들의 상념에서만 머물렀기에 수많은 철학자, 이론가 ,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즐비했었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시대 이론들이 속속히 밝혀지면서 보다더 정합적으로 되어가는중이다. 시대 이론이 더 정교해지고 명확해질수록 다양성은 줄어든다. 왜냐면 모든 의미나 지식의 구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갈수록 논리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설득력을 가지는 이념이나 선구적인 발명가치들은 오직 구조에 부합되어야만 한다는 "논리학적 대전제"를 토대로하기때문이다. 내용이 길어졌다.
다시돌아와서, 이제 민주주의의 초라한 허점들을 비판해야하는 입장에 서보자면, 사형제 또한 국가체계에 따라서 다변화된 의도를 포함한다. 단순히 사형제도는 도덕이나 죄와 책임을 상정하지는않는다. 중동이 사형하는 이유는 이슬람의 교리와 전통을 지키기위해 종교적 권한과 밀접하며, 미국의 사형제도는 야경국가로써의 패권을 지키기위해 내부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는것이며, 과거 영국의 사형제도는 홉스의 정치철학에서 영향를 받았다. 중국이 사형제도가 있는 이유는 국가권력을 인민들로부터 순시하며 불만을 묵살시키기의해 공산당이 직접 주도하는 강경질서이다. 위에 국가별 사례에서 가장중요하게 볼것이 있다. 사형제도는 도덕적 수행 역량을 국가 권력에게 부여한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체계나 역사나 전통에 예속될 뿐이다. 한국이 사헝제도를 원하는 이유는 범죄예방이 아니라, 범죄자에 대한 사적인 분노감정을 해소할수있는 창구이다. 법이 그렇게 이성적이고 한국인은 그렇게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시민이라고 자처하지만 범죄자에 대한 악질 감정이 사형제를 옹호하려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일뿐이다. 이러한 한국의 사형제 찬성 여론은 인간적 교화와는 전혀 거리가멀며,이성이나 원칙에 준거한것이아니라 고작 범죄자에 대한 폭력을 예견하는 군중들의 분노가 법을 활용하여서 사적 동기를 은폐시킬수있는 가림막 안에서 결집한것에 불과하다. "사형제 찬 반?"가 아니라 "범죄자를 사람들의 손으로 해치우는것에 대해 동의 혹은 반대?"라고 바꿔서 질문해보면 과반수를 차지하는 국민들이 그것에 열렬히 동의할지도 충분히 예상할수있다. 아마 찬반 비율은 위에 2가지 질문이랑 유의미하게 차이나지는 않는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욕망을 근저에 깔아두며 "이성"이라는 소통 단위로 의결하는 동물이다. 사형제라고 불리우는 가장 견고한 이성적 테두리안에서 모든 범죄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고싶은 욕망이 사형제라는 법 하나에만 집약적으로 노여움이 발현되는 계기일것이다. 범죄와 범죄자는 따로봐야한다. 그리고 인간이 언제부터 죄라는 개념이 학습되었는가? 본래의 인간은 죄도 아니고 잘못도 뇌가 인식할수없다. 하지만 교육이나 문화의 계승을 통해 행동이나 자연의지의 상당한 부분을 "잘못"으로 규정했고 잘못 중에서도 죄의 영역을 적시함으로써 인간은 선량한 사람과 죄인으로 이원구도로 점철되었으며 오늘날은 정상인.비정상인으로도 그런 문구가 통용된다. 인간을 작위하려는 역겨운 꼬리표들이 창궐하는 현대사회이다. 이런걸 프레임이라고 부르기도한다. 하지만 정말이지, 앞뒤가 안 맞는게 한가지가 있다. 뭐냐? 그렇게 과학과 실존을 성역화하고 추종하면서, 막상 개인의 성격이나 행동에 문제점은 왜 도덕이나 철학으로만 좁혀서 보느냐는것이다. 거기서는 과학따윈 믿지않는다. 그러나 성격을 고친다라는 맥락에서만큼은 인간이 과학을 믿는건 우습다. 바로 정신병에 대한 약물치료이다. 누군가의 성격을 문제삼고 관계지향적인 범주에서만 도덕을 자처한 비난을 누군가에게 일삼으면서 모든인간이 뇌과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감정의 복합물이라는것은 왜 인지하지못할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의 심리는 뇌 과학적으로 유의미하게 밝혀낼수있는 기술이 아직 없기때문이다. 오직 정신병으로 진단될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있는 수많은 정신병 중에서도 선천적으로 뇌 과학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형태가 사회적으로는 부조화를 이룸으로써 "인간적이디 못한 존재"로 치부된다. 이제 사회에서 부적격자는 두가지로만 정의된다. "인격이 더러운 사람" 과 "정신병" 으로.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이성적인" "보편도덕"으로 무장해서 주류 담론들을 구성하며 소수자의 인격을 배척하는데 몰두한다. 바로 "사회적 교화" 라는 미명아래.
역시 정치 철학자 푸코의 재앙이 현실화되었고 눈앞에 다가왔다.
푸코의 이론을 정리하자면 개인의 장막은 이미 붕괴되어가며, 군중이 자율성을 가진 개인의 지위를 남용하며 차지할것이다. 그러나 "군중"이라는 이름은 찾아볼수도없으며 미래에 사라질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하는 주체는 개인들이며 거기에는 아무도 "개인 의지"따윈 피력할수도없다고한다. 즉, 적어도 순수 자신이라면 아니 나 혼자라도 마지막 절명하는 순간까지 "사회적 교화"라는 반강제적인 참혹함에 항전하며 투쟁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교화를 세분화시켜보자면 사회화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과학의 개략적인 부분만 차출해서 "사회화"를 지금의 입맛에 맞게 조율되며, 개인의 권리를 묵살할 정도의 일종의."집단적 현시성"을 부각한다. 이렇게 탄생한 "사회화 권력"에 맞서기위해서도 정확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아니, 정확한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군중사회권력에 유리하게끔 선별되었는지 파악하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모든 논제들을 고사하고는 결국 이성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희대의 철학적인 숙제이다. 왜냐면 무의식이 어느정도까지인지 기준점을 측량할수없기때문이다. 내가 이성적으로 행동하더라도 심오하게 내재된 정념에 이끌린 전유물일수도, 내가 감정적으로 보여지더라도 철저하게 노출된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한 피상적인 느낌일수도 있다. 이성은 "보편"으로 해석되며, 공동체나 집단의 목표를 제시할수있는 확고한 네임드로 자리매김한다. 인간의 성격이 아니라 이성을 인간이라는 존재로부터 분리시켜서 "합리적이고 무조건 이성적인 인간상"을 강요하려드는 한국사회는 퇴행적인 서사시를 재차 옮겨쓰는 중이다. 올곧고 바른 인격이라.. 참으로 역설적이다. 선각자,지성인이라면 독선적이고 난잡했던 경우가 많은데도 말이다. 이성에 견주어서 욕망을 말해본다면 단언컨데 적절하고 건전한 욕망이란 존재할수도없다. 욕망은 그 자체로 추하며 타락했고 노골적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너무나도 영속적이다. 그래서 욕망이란 인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낼수있는 종합 예술이다. 예술은 정신과 육체가 함께 사무쳐야하며 매몰차게 도취되어야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세 이성의 기계가 되어가고있다. 밤이되면 퇴근하고 아침부터 일어나서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노동하고, 돈을 모아야하며, 집을 사야하며,친절해야하며, 분노하지말아야하며, 설득해야하며, 정직,성실,인내 온갖 규율의식과 당위라는 미명아래 인간은 중압감을 느끼며 산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사회는 유지되는걸 택한다.
그리고 나에게 종이 한 장의 서신이 도착한다.
"사회라고 불리는 탐욕스러운 궁전의 영주따위가 되도않는 국민이라는 호칭으로 농노를 부려먹으며 보호를 명분으로 욕망을 일절 포기하고 이성으로만 사유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