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ugitai Sep 19. 2023

영화리뷰 : 더 플렛폼 (2019)

욕망은 인간을 어떻게 죽이는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려 인간은 항상 고군분투하면서 각자를 겨냥한다. 소유의 개념이 책정되고 나서부터는 계급이 발생되며 이것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형성된다. 즉,  신분질서의 시작인것이다. 재화를 나누는 기준은 인간의 역량에서 비롯되며 서로의 특화된 능력에 따라 생산하기도 하며 첨예한 대립을 하기도한다. 소유권이라는것도 여기서 탄생한다. 소유권은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힘을 행사할수있는 강자는 더 많은 파이를 잠식한다. 반면 강력한 힘을 거부하고 저항하려는 노예계급에게는 정당하고 공정한 분배를 사회적으로 요청해온다. 그러나 사실 노예계급이나 하층민이게 "공공선"이란 그저 힘없는 자들의 명분이다. 공공선이나 정의로움을 강조해야만 힘 있는 강자만의 질서를 타개할수있기때문이다. 강자의 법칙에서는 능력에따라 배분된 풍족한 소유권을 향유하더라도 하층계급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부조리하고 불균등하게 체현된다. 사실 위 아래 계급 둘다 똑같은 접근양식이다. 위에서 접근해도 과거 역사를 통해서 보수주의적 기득권이 형성된 이유에 의거한 합리성을 근거로 삼을수있다. 예를들면 인클로저라는 신흥 부르주아가 생긴배경은 철저하게 자유로운 경영권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기에 농업인들은 기존의 농지에서 배척되야할 대상이라고 말할수있다. 반대로 아래로 접근한다면 불평등과 도덕적 모순을 주장할수있다. 예를들면 "농장에 소속되어 농업을 하고있었지만 그들이 토지를 인수하여 양때목장으로 운영하면서 모두 양때목장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또한 인간이기에 노동권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할수있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상층 하층 계급이론은 사실 마르크스의 계급론에 부합되는것이다. 너무나 소급적인 범위이기에, 개인적으로 막스베버의 자율적 신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구조 이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 즉,  여러가지의 다양한 상황이나 역사적 계기가 어우러져서 신분은 계속적으로 대체할수있고 가능한 상태를 유지한다는것이다. 불변적이고 항상 지배-피지배 관계에만 고착화되어있는것이 절대법칙이라면 세상은 아마 음울할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영화가 바로 오늘 리뷰할 "더 플렛폼"이다.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은 정체모를 노인을 마주본채 방에서 깨어난다. 일단 개략적인걸 설명하자면 6개월간 수십 수백층으로 구성된 감옥 방에서 버티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수있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먹다남은 음식을 아래층까지 배달하면서 섭취를 해야한다. 만약 먹지못한다면 굶어죽거나 식인행위를 할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리고 한달 주기로 층은 무작위로 바뀌서 생활한다.

 그래서 청년은 앞에 노인과 대화를 나누며 일상얘기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몇마디 건내지만 주변 분위기는 음산한데도 노인은 상황을 파악하지못하며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얘기를 곁들이며 자신이 사람을 죽였던것을 회고하는듯한 메세지를 전한다. 그리고 위에층에서 먹다남은 음식이 내려오고 노인은 몇일 굶은듯이 허겁지겁먹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년은 음식을 쉽사리 입에 넣지를 못한다.

음식이 내려오는걸 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만 국한된것이 아닌, 기술문명이나 여러 학문적 가치가 위로부터 창출이되어 잔류된 이후에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일괄된 규칙을 상정하는것 같았다. 사실 물질문명도 군사기술이나 국가주도의 개혁, 강자들의 주도권 경쟁으로부터 남은것들이 잉여가치로 환산될때 서민들은 그러한 혜택을 누린다. 수많은 학자들의 발자취, 그리고 고혈을 짜내면서 골몰한 학문들은 오늘날 공교육으로 쉽게 접할수있다. 혹은 그걸로 개인의 품성을 테스트하거나, 거대 권위를 창출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되는 진실이란 인정받지 못했던 당대의 학자들이 지금에 와서는 후생적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의적으로 이런 현상이 발생한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역사의 태동은 항상 기존의 본질이나 의도를 왜곡하는 경향이 크다. 자유를 위해 제도나 이론을 만들어도 나중에는 국가가 그걸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명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걸 잘 표현한 영화의 소재이다.

그리고 남긴 음식조차 먹지못한 사람들은 인간에 내재된 본성과 야욕을 드러내며 굶주림으로 이성을 잃은 서로를 죽이고 상황은 좀 더 격해지며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수도없이 제노사이드로 변해간다. 심지어 100층 아래의 사람들은 이미 사망했다. 그리고 1층부터 10층까지(위로갈수록 숫자가 줄어들며 스팩이나 등급으로 가치를 책정하는 사회를 잘 표현했다)는 여유로운 분위기에, 1층의 지배자는 요리사들의 뺨에 음식으로 치장하며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는 행동들을 일삼으며 혹독하고 고단한 아래층의 상황 따윈 아랑곳하지않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건 품위와 야만의 간극으로 설명가능하다. 품위란 그저 본능과 추악한 다크사이드를 은폐할수있는 마스킹 전략에 불과하다. 이건 높은 신분일수록 도덕적이고 정숙하게 보여지며, 모든 감정은 우회적이고 은유적으로 표방된다.

그리고 반대로 낮은 신분일수록 인간의 원초적 속성이 잘 드러나며 언동이 매우 직설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높은 신분은 우월하고 인간적이며 이성적인가?

아니다, 사실 이건 엄청난 착각이다.  선의를 가장하기위해서는 가장 먼저 인식되는건 도덕이나 이타심이 아니라, 신뢰감이다. 신뢰감은 행동으로도 관철할수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직 계급이 증명한다. 계급에서 신뢰를 담지하는것은 행위가 축적된 일종의 상징성이다. 결국 그것은 "평판"이나 "명예"의 정도를 책정한다. 그래서 무조건 착하기만하고 이타심있는 사람은 그만큼 돌아오는것은 크게 없는 이유이다. 매정하고 냉소적이고 이기적으로만 살아라는 뜻이아니다. 이러한 품위를 결정해줄수있는 구성원이나 동질 계급의 흐름에 편승해야만 한다는것이다. 개인 도덕은 계급적 평판으로 완성되기때문이다. 성공한 사람이 성공에 대한 노하우뿐만아니라 정서적 신뢰감이 있는 이유도 이러한 심리학적 기전에 비롯된다. 이걸 역설적으로 보면 인간의 추악한 내면 조차도 계급이 충분히 소거해줄수있으며 모든 인간은 최하류층에게도 볼수있는 야만성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재확인 가능하다. 자신이 부자이며 잘산다고해도 한정되며 소모적인 인간임을 머리속으로 곱십으며 숙연해질수있는 겸양을 스스로 길러야한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걸 철학적 목표로 삼으며 실천하려한다.  또한 나 자신이 가난하고 태생적으로도 만족스럽지못한 열악한 환경에 자랐다고 한들, 위험자체로 던져진 상황이나 다름없다. 최악의 환경으로 시작했다면 최악을 담보로하는 치명적이고 원대한 도전을 살면서 해보는것도 나쁘지않다. 그런 환경이라면 절대로 잃을걸 두려워할 필요가없다. 어떻게보면 가질수록 나약해지며 편안할수록 방탕해지며, 행복할수록 안일해지는게 인간이다. 반대로는 굶주릴수록 먹는게 행복하고, 뒤쳐질수록 시도할수있는게 많고, 힘들수록 굳건해지는법이다. 그래서 난 오히려 나보다 힘든 환경에 자란 사람을 강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고 니체가 말한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체념해야만하는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걸 불만할지 만족할지는 나의 선택일뿐이다. 마치 이건 암울하게 보여진다.

그리거 또 구절에서 이런말이 있다.

"노예는 주인보다 강하다"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대체 무슨말인지 의아할것이다.

사실 주인은 노예를 지배하는것이 아니라 관리하는것이다. 관리하는 행위가 흐트러지거나 경계심이 어긋난다면 언젠가 노예의 항변과 투쟁에 못이겨서 비참하게 죽을수도있다.

즉, 언젠가 무사안일에 빠져서 노예를 관리하게되어 패자라는 지위를 잃는건 역사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항상 존재한다.

반대로 노예는 주인을 항상 불안하게 할수있다. 겉으로 순종하는척을 하여 주인을 얼마든지 속여서 회심을 노릴수가있다. 그리고 주인이 가진것을 편취할수도있다.

사실 잠재적인 힘은 노예에게 있다는것이다.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정립된 이후에는 상황을 전복시킬 열쇠는 노예가 쥐고있기때문이다.

이제 감옥에서 1달후 46층이 아니라 더 낮은 층으로 주인공과 노인은 배치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눈을떠보니 몸이 팽팽하게 끈으로 묶여있었고 노인이 그 청년을 묶은것이었다. 100층이하의 아래층에서는 남은음식 조차 없는것을 노인이 직시한 나머지 먼저 청년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한것이었다. 그리고 살점 하나하나를 7일이 지나고부터 절개를 했고 주인공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때, 위 층에서 사람이 내려와서 노인을 죽이고 주인공을 구해준다. 이제부터 그 노인은 주인공의 환영에서 계속 나타나며 괴롭히게된다. 사실 노인은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의도를 영화 각 장면마다 대사를 던지면서 적절하게 주인공의 행동을 지적한다. 심지어 잔인한 행동을 하도록 독촉하기까지한다. 어쩌면 이렇게 주인공과 노인의 대조적인 인격을 교차하여 노인이 죽고나서도 2명이 공존하는것과같은 상황을 표현할걸보면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이 생존법칙에 피력된 도덕적 딜레마에 어떤 행동을 선택할건지의 갈등을 잘 표현했다. 역시 인간의 청사진은 너무나도 불안정하다.

(결정적인 스포주의) 이제 영화 마지막 부분은 허무주의를 묘사했다. 결국 도달하는것은 무언의 메세지라며 그걸 알아내면 우리는 탈출할수있다고 동료 1명이 주인공을 설득한다.그리고 동료는 주인공에게 매우 먹음직스럽지만 메세지를 담고있는 케이크라며 주인공에게 건내준다.(케이크를 먹지않고 지킨다면 메세지를 알수있다. 그러나 눈에 불을 켜고 음식앞에 덤벼들 정도로 매우 굶주린 상태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제 지긋지긋한 감옥을 탈출하기위해 자동식탁 위에 탑승해서 케이크를 가지고 밑에 층까지 도달한다면 종착지가 있을거라는 희망을 품고 동료 1명이랑 내려가면서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케이크를 지키면서 케이크를 뺏으려는 수많은 아래층의 굶주린 사람들과 사투를 버린다. 결국 먹지말아야 할 케이크 앞에서 통제를 상실하며 한 손가락 정도 먹으며 버틴다.

삶도 같은 맥락에서보면, 무언가를 위해 나아가려면 가장 먼저 포기해야만하는 가치는 "욕구"이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인간은 욕구를 선택해야만 삶이 행복하며 만족스럽다. 하지만 삶이 전달하는 장기적인 의미를 자각하기위해서는 초월체가 되어야만하며 욕구를 건들이지않고 지켜나가는 투지의 과정은 너무나도 필연적이다.

 결국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않았고 위에 하나님이 지상에 도달할거같은 형상과 함께 빛이 서치라이트 처럼 식탁과 주인공을 비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동료로 부터 참담한 말을 듣게된다.

사실 메세지는 너에게 없는거같다고.

그렇다, 인생은 덧없는거같다. 차라리 죽으면 삶을 사는것과도 같을 노릇이다. 하지만 인간은 쉽사리 그러지못하고 여전히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의미이다. 죽음을 깊은 심연으로부터 구현했을때 나타나는 공포는 삶을 생경하게 바꿔준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갈수있다.

그래서 흔하교 유명한 구절이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이것도 역시 니체가 한 말이다.

개인적으로 철학에도 니체에도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고단하고 지친 마음을 되짚어볼쯔음에 이상하게도 불현듯 니체의 말들이 떠오른다.

역시 고통 철학의 대가인듯하다.

 그리고 주인공은 홀로 지하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문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여태까지의 전개된 분위기와 달리 갑자기 노인의 환영이 또다시 출몰하여 청년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사실 메세지는 없으며 너무나도 일상적인 대화를 주도하며 영화는 끝이난다.

때로는 인생이 서사처럼 느껴지고 뭔가 풍미있고 어지럽기도하고 장황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다르게보면 너무나 조잡하고 따분하고 지엽적이며 사소한것이다.

왜냐하면 두 다리로 길을 걷는것은 단순하고 쉽고 편하지만, 먼길을 걷게된다면 어렵고 힘든 고통이다. 당장 지금이라도 일상을 해결할수있을거같은 의지가 솟아올라도 내일이 된다면 욕망에 절여진채로 비탈길로 접어들어가며 매일이 반복되면 돌이킬수없는 삶의 회한으로 잔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을 고통이 있고 위험을 수반할수있음을 각인해본다면, 무엇을 하든 성공할 준비가 되어있는 "선인"이라고 칭송할만하다.

작가의 이전글 욕망이 박탈된 기계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