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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ugitai Oct 29. 2023

뒤엉킨 절경

걷잡을 수 없을 상념에 헤어나 올 수 없을 정도로 고뇌할 때가 있다. 타인의 무지가 나한테 과감하게 침범하는 순간만큼은 벗어나고 싶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늘 일차적인 영역에 머무른다. 이건 주변환경이나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기에 심층적이기보다는 직결적이고 간소하게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들이 자아낸 분위기는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때론 그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보다는, 명료한 것만 추구하려는 것을 본다면, 나에겐 그저 순수한 탐닉으로만 비친다. 그리고 회의적으로 보려는 누군가를 향해서는 고지식하다, 이론적이다라는 타이틀이 붙여지면서 저만치 군중들 그림자 어깨너머 점차적으로 구획화되는 것 같았다. 물론 간단하다고 본질을 흐리는 게 아니다. 어쩌면 간단한 것이란, 깊게 접근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의미를 구체화하지 않은 감각적인 형태만을 놓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사람들이 인생이 고달프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상에 지극히 인간애적으로 사고되어야만다고 스스로 규정하며 삶의 의미를 심오하게 침습해놓아서 생겨버린 댓가가 아닐까? 자세히볼수록 평소에 보이지않던 미세한 티끌이나 잡음들마저 선명해진다. 어쩌면 인간이 예지적으로 느껴야할 미래의 고통은 보이지않는다는 즉, 묵시적 조건하에 고통들이 이미 준비된것에 불과한걸까? 아니면

무사안일하고 평온하다는것은 자세히보지못해서 생긴 자신에 대한 방만인걸까?

만약 위에 그것이 모두 기정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것은 무책임하다는 역설을 강조하고있는게 아닐까? 라는 숙연한 마음마저 느껴진다.

더 나아가 무심하게 애써 아무렇지도않으면서 남에게 헌신하는 누군가에게는 고통따윈 인식하지못하는 면모를 보여주는것 자체를 내면의 미덕으로 삼는것같다.

아마도 타인에게 선의를 배푸는 누군가에게 도덕적 함수는 자신의 희생과 고충을 충분히 인식하는것과 동시에 그것들(고통)에대해서 철저히 모른다는걸 증명하는것, 이 두가지가 반비례하는것같다.

말 그대로 "당연히 해야할일"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타심인것이다.

그럼 여기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과연 그게 뭘까. 나는 다시 곰곰히 생각에 빠진다. 당연하다는것이 어디서 출발하는지가 더 의구심이든다.

인간은 늘 당연하다는 것을 설명서처럼 의존해왔다. 왜냐면 당연하다는것은 여러 갈등이나 관계망 네트워크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타당함"으로 산출된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럴때마다 사회적 필연이 도래한다. 그리고 절대법칙을 가정하에 개별성보다는 보편적인 준칙을 마련하고 설계한다. 개인은 준칙과 관련된 행위에 대한 타자의 보상을 기대하려는 일종의 "수요"가 창발하게됨으로써 그러한 준칙은 공고히 굳혀지면서 규칙이나 규범을 형성한다. 그래서 당연하다는것이 여기서 출발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당연함을 어떠한 통제적 권한으로 삼는경우가 있다.  이것을 관점이나 견해에도 있어서 구심력으로 작용하기도한다. 누군가를 억압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지못하도록 단절시키기도한다. 즉, 사회적 고립으로 특정한 소수를 몰아넣는다.



몇달전 백모 군(영재)의 뉴스를 봤다. 사람들의 생각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쩜 저런애를 고등학교에 왜 보내냐?"  "대체 자기가 얼마나 똑똑하다고 착각하는거야? 등등 눈쌀 찌푸려드는 혐오표현들이 곳곳에 방출되었다.

겉으로는 합리적인 의견을 표명하는것 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속내만큼은 백모군의 재능을 선망함으로써 표출되는 반대감정이거나, 부질없는 개인적인 시기질투를 은폐시키기위해서 교육적 근거를 제시하는것과같이 치졸하게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을 별로 유념하지는 않는다.

생각에서는 누구든 다양할수도있다. 도덕적 감정만을 앞세워서 저런류의 견해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나 또한 스스로의 억압을 자처하는것이다.  이것은 낙관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존중을 넘어서서 타인에게 사유될수있는 가능성이나 영역을 나에게도 모두 포함하는것이다. 최대한 개방적인 사고를하려면 모든 견해는 하나의 좌표나 위치일뿐이라고 생각해야할것이다. 누구의 생각이 어떠한 우위를 점하거나 깊거나 얕거나, 단순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며 이제 "척도"  "가늠"과 같이 비교선상에서 불리우는 접근들은 지양할 필요가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니체가 말하길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위치와 상황을 겪고있기에 사물의 본질마저 완전히 일치할수가 없다. 그러나 겪고있는것만큼은 일관되었기에 우리는 그걸 대상이라고 통칭할수밖에 없는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불완전하다는 후술도 한다.  그래서 초자아가 인간을 이끌어야한다는 부분도 그는 강조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난 초자아가 아니라 해체주의 철학이 더 걸맞는거같다. 절대 진리를 상정해놓고 인간이 교화되어야한다는 시각은 폭력적인거같다. 아니 그 자체는 매우 원론하며 순수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힘없는 타인을 예속시키는것으로써 악용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래서 과거에 철학은 이제 지금의 해석학에 주도권을 넘겨야한다.  

정신적 지배만큼 거북하고 침울한것 없는거같다. 전근대적인 육체적, 물리적 지배의 시기에서 인간은 해방되었지만, 늘 그때와 비교를 하면서 지금의 상태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이것도 할수있다" "그때는 이랬지, 그러나 지금은 매우 풍요로워" 와 같이 현대사회를 혀가 마르도록 칭송하는 행렬이 분위기속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모든 대상을 비교한다면 배설물을 섭취하는것이 행복하다는것 또한 성립한다. 과거와달리 지금은 어느정도로 행복한지와 같은 국소적인 질문이 아니라, 지금은 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추구할 기회가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보자.  이것은 질적인 차원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세에 대한 물음이다. 일단 "무엇"이라고 불리는것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그리고 거기에따라 기술 문명은 발전해왔다.

그러나 후자로 본다면, "어떻게" 추구할 "기회"가 있는지는 지금도 변함이없고 현실적 구조에의해서 한정되어있다. 여기서 인간은 삶의 불행을 여실히 느낀다.

아무리 현대의 오락이나 취미가 과거와 다르게 변하고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어디든 다니며 보일러와 전등이있는 방에 있어도, 그걸 어떻게 즐기고 어떻게 추구할 기회를 생성하는지에 따라서는 철저하게 삶의 여건이나 경제적 사항에 의해서 제약받는다. 이것은 기술문명과는 다르게 옛날과 지금까지도 통시적이다. 보일러와 전등이 나오며 TV를 시청하고 게임을 할수있지만, 직업을 구하고 노동을 해서 자신을 착취하는만큼 얻을수있는, 그저 등가교환이다. 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현대문명을 누려서 이익을 보는것같지만 사실 자신의 인생에 무관한 시간을 팔고 돈을 그만큼 받아서 줄어든 시간에 잉여 행복과 만족감을 가지는것이다. 그래서 첨예화되고 복잡해진 사회에서 모두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중요한건 난 이걸 결코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특히 이런 논제를 다룸으로써 머릿속에 "노예"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간 사람들이 분명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 "편견"이다. 오히려 그 편견들이 인간을 더더욱 이해타산적으로 만드는 모순적 실태를 형성한다. 조금이라도 책임지지않고 편하고 손에 주름없이 윤기있는 삶을 살고싶은게 인간이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간섭받지않고 무조건 자유로워야하며, 욕구대로 적절하게 행동하는게 필연적이라고 느껴왔을것이다. 그렇게 책정된 인간 본위적 잣대는 모든 불편한 대상이나 제한적 요소들을 "노예적인 상황" 으로 간주해왔다. 그러한 머릿속의 텍스트는 역사교과서를 포함한 모든 교육적 차원에서 심각성을 드러내어왔고(예를들면,아프리카 삼각무역이나 로마의 노예제도를 거론하면서 오직 민족해방을 방점으로 다룬다던지) 개개인은 그것에 고스란히 노출이되어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갈망한 덕분에 어느정도의 사회권을 보장받았다는 긍휼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또 반대로는 개인의 일상에 노출되는 수많은 기능성이나 역할들이 자신의 시간이나 공간을 축소시키는것과같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노예와 연상되는 키워드를 떠올리며 비약적인 사고로 확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결국 현실비관이 자책을 넘어서서 정치적 불만 사회적 불만으로 넘어가면서 담론을 형성하기도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몇문단 위에 서론에 기제해놓았듯이 "삶을 자세히 볼수록 고통스러워진다"는것이다.

 그런건 원래 자세히 보는것이 아니라 있는그대로 볼수록 태연해진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내던져져있는지, 혹은 어떤 취급을 받고 사는지를 느끼는게 아니라, 이제 어디로 향할지, 어떤 사람이 스스로 될수있는지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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