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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ugitai Jan 18. 2024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리뷰

인간의 죽음으로

인간은 태어난 직후 단 한번을 살아간다. 물리적으로 체현할수있는 존재는 최초이자 최후로  나 자신에게 머물러있기때문이다. 타인과 절대적으로 분리되어서 살아가기에, 누군가와의 사소한 비교로 상처를 받거나 그걸통해 자신을 인식하거나 마찰되는 부분에대해 교감하거나 대화를 하기도한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항상 긍정적일수는없다. 때론 나라는 존재는 좌절하기, 절망하기, 심지어 스스로 갉아먹고 파괴하는것을 일삼는다. 그리고 대부분 일생중에 자살충동을 느끼기도한다. 자살은 심리적으로는 죽고싶은 의도를 상정하지않는다. 뇌는 생존본능의 유효함에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을때 상황 자체를 종료하는것을 해결책으로 인지한다. 그래서 뇌가 오류를 발생시킴으로써 "자살"이라는걸 결정한다.  자살은 뇌가 죽음으로 보지못하며 상황에서 해방되어 안정감을 되찾기위한 시도로 해석한다. 그렇기에 자기자신에 의해 행동되어지는 스스로의 죽음은 새로운 삶의 연장이라고 볼수있지만 실재적으로는 소멸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상호 모순적이다. 자살에 대한 침울하교 격동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그것을 실행하는것은 매우 비극적이며 그 결단이 현명하다고 차마 덧붙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다. 하지만 자살에 대해 나 자신에게 죽음을 결정내리는 사안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고찰해보는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그런 주제는 삶에 대해서 재고해볼수있는 생경한 기회인것이다.일단 필자는 자살을 떠올렸을때, 내가 지금 죽음으로써 어느곳에 도달하는가? 라는 생각부터 하게된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어느곳에 도달할것같은 느낌인가? 에 가깝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사후에 위치나 공간을 이해할수도 넘나들수도 없기에 역설적으로는 그런 공허감이 자유롭게 생각할 의지로 전환된다. 즉, 지금 의식을 유지하고 느낄수있는 현시감에서 해방이됨으로써, 내가 있다는걸 피상적으로 부정하고 거기서 발생되는 감각에 대한 막연한 접근이다.  그런 막연함은 육체적 정신적 사후에 대한 세계관의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하여 다양한 사후의 이계를 창발할수있다. 어쩌면 상상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이 현실적이지못하며 때로는 기시감이 느껴질때쯔음, 생각이 중단될때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그런 이성적인 죽음에 대한 고찰은 끝맺음을 한다. 그래서 결국은 삶으로 귀결되는 "긍정"에 도달하였기에 죽음은 매우 현명한 고민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있는 찰나에 제작한 "이재 곧 죽습니다"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이다.

인공 최이재는 잘생겼으며 인기도많으며 대기업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생활이 더이상 나아지지않아서 빌딩위에서 자살을 한다. 그렇게 깨어난 존재는 지옥에 오기되고 죽음을 담당하는 악마의 사제가 그에게 "12번의 삶이 환생함으로써 주어질건데 모두 생존을 하지못하고 죽으면 마지막에는 안죽고 불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스럽게 살게될것이다"라는 언도를 내린다.그리고 그는 5번째의 환생에서 다른 사람의 신체로 자신의 모습을 간접적인 3자의 시선으로 보기된다. 주변에 지인들이 최이재의 인생을 존경하며 칭찬하는 모습에 극적으로 감화된 5번째 최이재(다른 몸)는 자살을 결심한것에 대해 후회한다.
결국은 자신의 삶에 불만족했던 사실을 되돌하보며 통탄하는 모습으로 지옥에 다시 찾아와서 연거푸 다시 돌아가고싶다는 말을 한다. 이것을 보면, 불만은 의외로 짧고 간결하며 굉장히 사소한곳에서 찾아온다. 그러나 계속되는 생각으로인해 불만은 크게 체감된다. 일상속에 불만으로인해 여러번 살고싶다, 혹은 다시태어나기, 리플레이, 과거 회귀 등등 인간적 고통은 삶의 전체적인 영역을 목도한채로 수많은 상상력을 촉진시킨다. 본 드라마는 그러한 종류의 철학적 상상력이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물을 막론하고 자신만큼 영속적인건 없다. 우리모두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도 현저하게 다른 느낌을 받고산다. 어쩌면 소리,시각,촉각, 색깔, 느낌, 등 그것조차 화학적신호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는게 최근 밝혀진 연구결과이다. 그러나 그걸 객관적으로 입증하기에는 추상적이다. 느낌을 표현할수있는건 언어지만, 언어가 표현하는 기호에 의해 감각이 규정됨으로써 감각은 더 이상 세분화된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예를들면 눈앞에 정지 신호등이 켜졌다. 눈앞에 켜진 색깔은 무언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모두 빨강이라고 답을한다. 누구나 숙지된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빨강색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이미 완료된것이나 마찬가지다. 동일한 상황에 동일한 부호인 "빨강"으로 합의했기에 세부적인 추론은 불가능해진다. 물론 빨강이 무엇인지를 형용사적으로 설명할수는있다. 정열적이고, 타오르고, 과감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빨강이라는 시각을 어떤방식으로 화학적인 경험을 하는지, 부드러운 느낌이 차가운 느낌이 각자가 어떻게 느낌으로써 그런 단어를 사용하도록 학습되었는지를 부가적인 설명은 생략이 된다. 부드러운 촉각은 마찰이 없는 편안한 촉각이라고 할수있지만 마찰이 없음으로써 "뇌"라는 기계가 어떤 정밀한 반응을 하는지는 인간 신체에 따라 개별적이라는것이 과학계의 주장이다. 최근사이에 이런 가설은 신빙성이 있으며, 기존의 뇌 과학의 고전적 메커니즘(뇌가 담당하는 부위,감정 중추, 우뇌 좌뇌와 같은 결정성 이론들)은 상쇄될것이라는 전망이다. 인간 삶 중심의 범주로 다루자면, 누구나 행복또한 다르게 느낀다는것이다. 타인의 삶이 부유하거나, 편안하고 화목하다면, 그건 나를 기준으로 보이기때문이다. 간과하고있는점은, 그들은 그것을 정작 알지못할수도있다. 내가 보고싶고 갈망하고있는 가치가 있기에 타인에게 투사된 행복이 존재하는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없는것은 나에게 있다. 아니 각자에 존재한다. 바로"자신"이다. 드라마의 마지막에는 자신이 유일한 "나"였기에 누구도 가지지못한것이기에 소중하다는 맨트와 함께 막을 내린다. 고귀하고 소중하고 대수로운것을 초월하는 단 한가지는 "고유함"이다. 고유함은 감히 누구도 범접할수없다. 확률안에서 극복할수있어도 모든 개체군을 표집하는 확률 자체는 절대로 승복시킬수는 없기때문이다. 그런 특이점을 아는순간, 자아는 진정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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