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ugitai Feb 27. 2024

민주화 포석의 주체는 무엇인가?

독재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가?

최근 이승만에 대한 영화가 나왔다. 건국전쟁이라는 영화의 장면속에 정권을 미화한다는 비판과 이승만을 옹호하는 견해와 상충하고있다.  그것과 관련하여 민주주의라는 대목은 빼놓을수없는 소재이기도하다. 사실 민주주의의 주요 안제가 화두에 오른것은 이승만보다 박정희 시기에 팽배하다. 이승만 시절땐, 정치가 분화되기 이전이었고, 독립 이후에 미군정 신탁통치로 인해 내부 질서가 미형성된 상태였기에, 민족주의와 현대 공화주의의 갈등에 가까웠다.  사실 그 당시 이승만은 자유주의자보다 독립운동가의 정체성이었던만큼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과 같은 계열들도 대부분 이승만을 지지했던것을 보면 우익이나 미국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국가의 지도자로써 봤던것이다.(종종 자유주의자들은 그 당시에 많은 국민이 이승만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이 유능하다고 단정짓는다.)
그 이후 국민적 기대와 달리 다른 방향으로 국가 정세는 흘러갔고, 부정선거 이후 박정희 내각이 출범하여 장기집권이 시작된다.

박정희로 말하자면, 그는 경제성장에 우선적으로 집약시켜서 국가의 성장을 도모했다.국민들은 가난했으며 기근에 시달렸고,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교육 형편이 미약했다. 가난은 독재를 불러온다. 그리고 얼마든지 정당화할수있다. 그러나 독재가 경제를 성장시킴으로써 풍요로운 환경은 정치적 참여와 민주 가치 정서를 형성하며 결국 민주화로 점철된다는 이론은 매우 자명한 사실이며 위에 그가 설명하는 바도 같다.  하지만 박정희 개인이 민주화를 이룩했는가?  위에 그의 주장을 보니, 박정희가 독재를 한 이유는 미래에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결부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그건 지극히 후험적인 해석의 영역일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예지적 가치를 위해서 박정희 개인의 의도가 피력이 되었다는 헛소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들었을까?  그건 어디도 찾아볼수없다.  왜냐면, 박정희는 실제로 장기집권을 목표로 유신정권을 무기한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던 인물이다. 눈치 챘겠지만 영구 집권은 애초에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항구적으로 고려하지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결국 박정희는 50년 6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가 없기를 고대했다는것이다.

그리고 이론은 어디까지나 선험적이다.  경제적 상승 효과가 민주주의를 불러오는건 여러 국가의 선례로 밝혀진 이론이겠지만, 절대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과거에비해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지만,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는 아직도 군부정권의 실세가 지배한다.  태국은 개인소득은 이제 중위권을 넘은 상태이다. 충분히 민주주의 단계를 밟을수있는 조건이 있음에도 20년동안이나 정체되어있다. 남미의 대부분 국가도 못사는 수준이 전혀 아니다.  그런 국가들이 지금 민주주의의 수준을 본다면 현저하게 뒤쳐진다. 즉, 경제성장이 민주화에 정향하지만은 않는다는것이다.  
해당 이론을 토대로 사례를 들수는있지만, 반례에서만큼 이론은 불일치하기때문이다. 일종에 이것은 "포스트 훈증주의적 오류"이다.

자, 그럼 풍요는 개인의 정치적 참여나 사상관을 고무시키는데 직접적으로 기인할까?  약간은 맞는말이다.  사실 풍요로움은 매우 범용적이고 호환적이기에 어떤 수식이든 현상이든 정당화가 가능하다. 물질(돈)이 많아서 학업에 유리하며, 즐거우며, 취미생활이 다양해지며, 옷을 사고 꾸미기도 좋으며 등등 모든것에 해당이 된다.  그럼 반대로 어린 자식이 행복한 이유를 "부모님이 생활비를 쓰면서 장난감과 푹신한 침대를 제공해주었으니 너가 커서 성공하거나 잘해야된다"고 강요할수도있다.  이걸보면 현대사회에는 물질적 개념이 너무나 만연해져있다.  성실함이 미덕이 된것도,  정직함이라는 가치를 소비 판매에 환원시키는것도, 시간을 잘지키는 사람을 부지런하다며 칭송하는것을 포함하는 모든것들이 개인을 노동집약적 자아의 총체로 전환시킨다. 인간은 개별적 자아를 상실하고 기계화에 좀더 주력을 하게되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AI에 의존하는 이유또한 인간 외적인 기계적 대상을 찾고싶은 욕망을 대변하는게 아닐까? 인간을 대신하여 기계적 자아를 완성할수있는 ai를 추구하는 이유도 자아를 상실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내용이 다른곳으로 벗어났다. 다시 돌아와서, 경제적 풍요로움은 정치적 활력을 불어넣는것과는 상관이 없다.  절차적인 맥락으로는 경제 성장은 기회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기회가 민주화의 포석이 될수있는 특질적 대상은 전혀 아니다. 민주화는 그것과는 다른 별개의 헤게모니 창출이 필요하다. 프랑스는 절대왕정때 섬나라 영국과 경쟁할수있는 유일한 대륙권 강대국이었다. 17세기 말 국가의 경제는 전성기였으며 중농업자들이 득세하던 활황기 시절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필요한 정념적 가치는 허술했다. 물론 몽테스키의 삼권분립의 초기 이념은 있었지만, 파리 고등법원을 통한 왕권 견제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자유주의를 학습할수있는 자생적 창구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경제성장따위는 그 당시 프랑스 군주정을 반대하기위해 자유주의를 가져오는 기능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교육도 상류층을 중심으로 충분히 이뤄졌고 하류층들은 공공장소에서 정치적 토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그 당대의 프랑스 경제적 풍요는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와 연관성을 찾아볼수도없었다. 즉,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에 맥락적 연관성은 없으며, 단지 경제성장이 그것에 얼마나 조력하느냐에 따를뿐이다.정치나 이념의 발생 동인은 적어도 교육이나 공통된 정치적 신조가 필요하다.  오히려 프랑스는 가장 가난하고 혼란스러울때 자유 혁명과 민주화를 선도했다.  프랑스의 19세기 중반에도 샤를 10세가 보수주의를 옹호하면서 세속화된 체제를 과거처럼 퇴행시키자, 국정실패가 지속되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거지와 부랑자들이 넘쳐났을때 독재를 반대하려는 정치적 관심이 증폭되었다.   가난 또한 독재의 책임으로 언제든 인식될수있으며, 경제 지표와 민주화는 무관하다는 사례이기도하다.
그러나 한가지 동의하는건 있다. 민주주의를 하고있는 국가를 보면 충분한 경제성장 이후에 달성한 목표라는것 말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일까? 라고 던진다면 여러 카테고리가 붙는다.  인권,평등,복리,참여,표현 과 같이.  그러나 절반정도는 자유와도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자유민주주의를 그 국가들 나름대로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준일뿐이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구심점은 될수없다는게 필자의 견해이다.  공동선의 정치를 뜻하는 의미에서 공화 민주주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사회민주주의, 계급적 투쟁을 통해 위계질서를 타파하려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또한 각기의 정통성을 지닌다.
사실 자유의 본원적 진리는 각 개인에 필적하는 양적인 자유이다. 하지만 국가가 무르익을수록 자유는 소유권 개념으로 언젠가 편승한다. 그래서 이제 자유민주주의라는 명칭이 따라붙는다. 그렇게되면 국가는 소유권을 토대로 시민과 국가간의 계약적 관계가 한 축을 이루며, 공동체를 향유하고 발흥할수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자유주의 생명력은 여기서 탄생한다. 엄연히 민주주의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상정될수는 없다.
많은 학자들은 민주화도 다양한 생활 도처 곳곳에 걸쳐서 포진되어있다고 말한다.
사회 민주화, 가정 내에서의 민주화,직장이나 노동, 교실, 성별,나이,  등. 수많은 곳에서 권리 증진은 미시적으로 가능하다. 가부장제를 탈피하여 돈독해질수있고 배려, 존중할수있는 가정환경,  직장 내 성차별, 괴롭힘, 부당한 위계 서열이 없는 인간애적이고 쾌적한 일터환경 또한 민주화에 해당된다.  개개인들의 의식과 정서적인 고취심으로도 충분히 압제를 타개할수있다.

어떤 권력도 민권과 결합할수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매우 익숙하게 모두가 속은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