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언가를 표현할때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그런 상호작용이 자아냄으로써 대화가 형성되며 나아가 문화를 양산해낸다. 언어도 다양하지만 여러 문화에 따라 관점은 제각기 상이하다. 특히 철학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다룰때 차이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편적으로 언어는 특정 문화나 민족, 지역에서 통용되어 다른 생각을 갖더라도 동일한 외재적 대상을 나타내는것에 쓰임과동시에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들끼리 잠정적 합의로도 볼수있다. 인간의 신체와 상호조율되는 감각에 직결되는 물질은 문화나 관념이 다르더라도 공통적이다. 의자, 신발, 책상,모자 이런것들은 인간의 신체와 맞닿아있는 생물학적 관계이기에 같은 개념과 대상으로 판별된다. 이런 형이하학 요소는 가변성에는 영향을 받지않는다. 하지만 추상적인것, 공리적 가치, 규범, 도덕과 관련된 형이상학적인 단어는 동서양의 차이에서부터 달라진다. 특히 위에 범주들을 총체적으로 다룰수있는 1가지 단어가 있다. "정의"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구현, 정의를 되찾자 와같은 문맥들은 워낙 흔하고 잘 알려져있다. 인간은 왜 어떤 역사적 또는 사회적 과정으로 정의를 자아냈을까? 동양철학에서는 정의를 옳음과 덕을 추구하는 실천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공자는 정의라는것을 신분과 역할의 소임에 피력했고, 성리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향유해야하는 문화적 통념을 추구하고, 동양 불교에서는 내세주의적 인내와 숙고를 상징한다. 반면 서양은 인간 이성에 의한 필연의 원칙, 냉철한 의지, 나아가 공적인 규범에 부합하는 정형화된 논리적 틀에 준하여 정의가 생겨난다. 이에 맞춰서 입법이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기에 오늘날에 정의라는것을 머릿속에 떠올릴때 법이 먼저 생각난다. 서양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완전히 실천할수없는 정의 라고 규정했지만, 역설적으로는 인간에의해 제어될수도 실천될수도있는것이 정의라는 논지를 열어두고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상황에따라 예측할수없는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인과론적이고 준거할수있는 공통된 행동 양식이 필요했기에 정의라는것을 확립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동일한 단어로 정의라는것을 맥락적으로 소비하지만 받아들이는 행태는 사람마다 국가마다 매우 기형적이거나 독립적이다. 한국사회에 정의라고 일컬어지면 이성이나 원칙적 합의가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고려에 치중하여 한 개인을 궁지로 몰고가는 조리돌림이나 괴롭힘으로 변질된다. 한국사회에서 옳지않다는건 무조건적으로 남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것만을 의미한다. 그 외적인 넓은 범위로 확장해서 볼줄 모른다. 남들의 시선에 휘둘릴만큼 궁핍해지고, 보이지않는 눈에 의해서 한국사회는 도덕이 아닌 "도덕감정"에 의해 지배받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표현하고 규정하는것보다, 사회가 마련하고 의도해놓은 설계도면에 손가락끝을 더듬거리며 인생을 버겁고 거추장스럽게 살수밖에 없는 분위기는 말할것도없다. 쉽게말하면,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찾은 이후에 그 반응들이 불쾌하면 이제 그것은 부도덕함이 되는것이다. 그럼 정의라는 개념은 위에 저것들의 반대말에 불과하다. 부도덕(한국사회 내부에 대체적으로 불쾌할만한 현상)한 대상이나 상황에다가 노골적인 폭력과 언행을 표출해도 그들은 저열해보일정도로 그런 행동들을 정의구현이라며 옹호할때가 많다. 공인이 잘못을 하면 심각할 정도로 몰입을하며, 막상 그것을 비난하는 그들은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면죄되는것은 더더욱 모순일것이다. 물론 필자는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정의와 옳음추구만을 비판하고싶은건 아니다. 단지 문화에 따라 접목되는 방식의 차이에서 나올뿐이다. 무조건 한국을 비롯하여 그런 사회통념이 고착화되어서 현대학적 가치들을 잘못 수용한것만은 문제되지않는다. 타개할수있는 변수들 또한 다양한 계층이나 기능으로부터 발전할수있기때문이다. 정의가 일종의 다수에의해서 지배되는 정서적 맥락이 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발휘할수있는 선진화된 조건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것이다.
아무튼, 그뿐만아니라 서양에서도 정의는 공적인 영역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동양과 비견된다. 하지만 그것에 개인주의를 더 강화하였으며 개인의 생각과 행동들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고 취급되는 경향이 크다. 내가 정신적으로 괴롭고 육체적으로 힘들고, 무언가가 불쾌하며, 혐오스러운 느낌을 받더라도 서양의 정의라는 개념이 대두되면서 외부 요인과 자신과의 분리를 선언한다. 자유롭게 개인의 행동을 펼칠수있지만, 환경에 의해 삶의 고통이 야기되더라도 자신에게 배아적으로 출발하는것으로 인식된다. 예를들면 냉정한 부모로인해 애정결핍을 느꼈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건, 어릴때부터 가난하게 자라왔건간에, 거기에 의해 발생되는 대부분의 심리적 현상들은 그것과 결부시키지않는다. 힘든 환경을 사회적으로 호도해도 서양에서는 그것은 사실로만 인정되며 발현된 감정들은 각자의 개인에게 극복할 책임이 전가된다. 서양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형이상학 개념들은 자아로부터 18세기부터 결별을 했다. 오늘날은 서양 철학적 가치들은 근대주의적 국가에 입각한 광범위하고 상례적인 체제속에 환원이 되었다. 개인은 체제속의 부품들로써 짜맞춰진 역할을 해낼뿐이다. 서양의 문화가 됨으로써 근현대국가가 탄생했고 그런 국가로부터 문화는 항구적인 정당성을 입증받으면서 상보적으로 접합되어있는 하나의 가치로 동일시된다. 그래서 "서양 문화"는 국가 존립성 그 자체이면서 내재된 서양인들의 습성에도 함께 존재한다. 반대로,동양은 개인 생각이나 공동체적인 관념들이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거나, 국가에의해 개인의 생각들이 변화된 일방적인 과정으로만 나타난다. 전자는 고조선, 고구려, 와 같은 건국 신화에 근거한 동아시아 특색의 씨족사회와 토테미즘이 지배한것이며, 후자는 중국으로부터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근간이 되며 문화의 자양분이 되는 사상이 위로부터 아래로 흘렀던 고려와 조선이다. 시민이나 백성과 같은 아래 신분으로부터 위를 계몽시켜서 거버넌스 자체를 만든건 서양권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필자는 양비론에서 머물지않는다. 사실 이것은 동서양의 생물학적 인종별 차이에서 나온다. 지리적으로 본다면 서양은 지형이 산맥이나 해안, 강,호수, 숲이 빈번하게 교차하거나 단절되었기에 독립적인 사고를하며 개인주의 문화를 만들어낸것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렇게본다면 일본의 경우에도 지형적 조건은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중부지역과 흡사하다. 그럼에도 일본은 서양처럼 그런 문화가 없었다. 물론 벼농사를 했지만 그런 요인이 중앙집권체제에 기틀이 되거나 집단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낼만한 계기는 없었다. 오히려 중국에서 들여온 행정체제가 일본의 지방호족들을 견제하기위해서 도입한 시점부터 동아시아의 전통질서가 내부적으로 미약하게나마 형성되던 시점이었다.
결국 단순히 지리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생물학적인 측면만 보자면, 서양인은 앞뒤로 머리뼈가 긴 장두형이다. 동양인은 앞뒤좌우는 평평한데 위쪽이 볼록한 형태의 단두형이다. 이런형태는 뇌구조학적인 차이를 유발한다. 장두형은 상대적으로 전두엽 두정엽 후두엽 측두엽을 포함한 면적은 전체적으로 측면이 우세하다. 즉 신경망의 발달 또한 단두형에 비해서 주로 앞뒤로 형성되며 좌우보다 신경 전달과 교류는 뇌 앞쪽과 뒷쪽간의 소통이 활발하다. 하지만 뇌 교량은 단두형에 비해서 좌 우측 교류는 약한편이다. 그러면 기능적으로는 독립적 사고가 발달된다. 좌뇌가 우뇌의 통제를 덜 받으며 그 대신에, 좌뇌 혹은 우뇌의 앞뒤 영역 즉, 전두엽-두정엽-측두-후두엽 간의 다변화된 영역들이 소통하게된다. 그러면 종합적이고 분석적인 사고가 단두형에 비해서 우세하다. 예를들면 전두엽이 판단을 내리며 두정엽이 논리 유형을 구축하고 정리를 하며 측두엽이 관련된 기억을 불러오며 후두엽은 대상을 최초로 인지한다고 대충 가정해보자. 개략적( 물론 4가지 부위에서 세부적으로는 다양하게 나뉘지만 설명상 생략하고 단순하게 예를든것이다)으로는 4단계의 기능들이 감각이나 외부에 한가지 포착된 대상물을 정교화시키며 심도깊게 통찰하는것이 단두향에 비해 유리하다. 즉, 대상이나 무언가에ㅜ대한 결론을 입체적으로 도출할수있다. 더 쉽게 예를들어 설명해보자. 내가 나무상자를 만들고싶다. 망치도 필요하며 나무자를 도끼도 필요하며 드라이브랑 본드도 필요하다. 그럼 나무상자를 만든다고했을때 각 도구들은 정확하게 무엇을 어떤 타이밍이나 상황에 해야할지 숙지를 잘하고있는것과같다. 그것이 장두형이 사고하는 방식이다. 이런것들이 근대 서양의 정신분석학, 서양 철학에 적소성이 있는것이다 아니, 단두형보다 이런것들이 좀더 활발하다고 볼수있다. 하지만 무언가와 연관짓지를 하지못한다. 바로 뇌 교량의 역할이 그것이다. 단두형은 고르고 위로 둥근형태이기에 신경망은 앞뒤보다는 전두엽과 두정엽 좌우측의 소통이 활발하다. 이런건 맥락짓기를 잘하는것에 도움이된다. 좌측 전두엽과 우측 전두엽의 소통이 필요한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눈앞에 놓여진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연필이라고 좌측 전두엽이 사물을 식별한다. 그러나 그 연필을 포함하여 다른 잡다한 필기도구들이 원통안에 여러개 놓여져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유가 필요해진다. 바로 이런 필기도구들이 들어있기에 필통이라고 부를수있다며 우측 전두엽이 "결정"이라는것을 내린다. 위에 2가지는 대부분 좌우측 전두엽의 기능이었다. 단두형을 가진 동양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세상의 진리를 논하기에 동양 철학에 어울린다. 규정하고 연관짓기를 순환적으로 반복한다. 대상을 통찰하는것을 유보하면서, 그 대상과 연관된 비슷한것들을 보려고한다. 초록색 나무들과 능선들이 있기에 산이라고 부르며, 물이 졸졸 흐르며 물고기가 있기에 냇가라고 부르며, 꽃들이 많고 꿀벌이 날아다니기에 꽃받이라고 여기는 그런것들이 바로 동양적 사고방식이다. 남들이 싫어하는 영화가 있으면 왜 싫어하는지 영화자체를 분석하는것보다는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더 궁금해하고 중요시하는것이 동양의 맥락적 사고와 연관이 깊다. 반면 어떠한 이유든간에 하나의 대상에는 하나의 현상을 찾으려는 서양이기에 이성은 사적으로 연구되어 사회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틀로 치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