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쓸려니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을때만큼은 깨알같고 번득이는 잡념들이 뒤섞여서 나뒹굴더니 막상 흰색 백지의 모니터를 보니 하찮게 굴던 사소한 생각들마저 떠나간다. 방금전까지 멍하니 창가만 보다가 오랬동안 묵혀서 시들시들해진 나의 문장은 딱딱하고 냉정했던 필체사본도 아니며,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문어체도 아닌, 그저 아무렇게 빈 공간을 어지럽히려는 얄궂은 장난질처럼 유치한것같기도하다. 그래도 냉큼 단어들을 수척해진 손으로 집어서 문장에 욱여넣으려고 용을 쓰는 나의 모습마저 고깝게 여겨진다. 항우울제를 복용한지 4달이 넘었다. 복용전 전까지의 풍부했던 심상과 때로는 난잡하고 때묻은 잔상들이 나의 앞길을 안개 서리듯이 가리면서 방해했지만 먹고 난 뒤부터는 마치 시끌벅적하던 테이블위에 손님들이 다 먹고 나가서 핏기빠진 남은 음식만 덩그러니 놓여진 무언가 외로우면서도 그 주변에 공허한 묵음만 이어지는 어색함만 남았다. 물론 그런 어색함은 보이지않고 불분명한 형상들을 묘사할수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겉잡을수없는 초조함과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않는 격정적 훼방은 항우울제 복용을 스스로 선택하겠끔했다. 그 이후로 온통 세상은 잿빛이었고 외부 자극또한 둔화되어서 생각하지못하며 나를 먹고 자고 일하는 생장기계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수년간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괴롭혔던 침투사고가 사라졌기에 결코 후회하지않는다. 큰걸 위해서 작은걸 포기할줄알아야된다는게 이런걸 말하는거같다. 큰걸 위해서 작은걸 포기를 한다? 여기서 작은것이란 뭘 말하는걸까? 진짜로 사소하게 여기는것일까? 아니면 원대한 가치이지만 하찮게 여기고싶기에 사소하다는 변명을 늘어놓는것인가? 얼룩진 세상위에 아래에 예시들이 많다. 국가를 위해 군인의 생명을 포기했다 , 가정을 위해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삶을 포기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 순간의 행복을 포기했다. 와 같이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포기란 누군가의 희생에서 움츠러든 용기를 겸손하게 표현한 단어인거같다. 그래서 희생되는 주체는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그 존재로써 너무나도 고귀한 나머지 희생하고자하는 대상에게 예속되는것에 익숙해지는것을 전혀 인색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때문일것이다. 나도 희생하고싶다. 그리고 나아가 누구나 희생할 용기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확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희생할 사람이나 대상을 누구로 지정할지 마땅하지않기때문이라고본다. 타인에대해 무관심하고 묵과되어지고 냉정해지는만큼 희생에 대한 부담감은 반대편에서 짖누르려하는 인간의 본성은 항상 내재되어있기때문이다.
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어제 재방중인 TV 프로그램을 봤다. 자기가 구매한 명품들을 자랑하면서 많은 고객의 호응을 얻는 방송이었다. 대부분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것을 보며 별로 탐탁지않게 여겼다. 마음한켠에는 불편하면서도 여태껏 시원하고 분출하지못했던 사회적인 찝찝함은 그 감정의 굴곡이 커지더니 마침내 경멸스러움으로 요동쳤다. 비싼 가방을 가져다가 방송의 조명등 아래에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손등 아래에 들며 화기애애한 표정과 어린아기 배넷짓 미소를 지으면서 광고를 신랄하게 하는 출연자의 모습은 나에게 굉장히 낮설었다. 그런 모습은 대중들의 광기 이상의 물질적인 욕구를 채워줄것이라고 예상할때마다 역겨움이 나의 가장 아프고 예민한 내면의 부위를 찌르는듯했다. 가죽 몇 겹이 엉켜붙은 가방따위가 누군가의 입속에서 찬미되어져서 그 가방은 화려한 무대위를 오르내리다가 금전욕구에 심취해서 그것을 구매하려고 열렬히 손짓하는 관중석의 누군가를 향하는것 같았다. 현실에서 이런것을 자본주의라고 부른다는건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이렇게 꼬리표를 달면서까지 규정해야만 하는 현상이 너무나도 가증스럽다. 대부분 문학 작가들은 자본주의를 혐오하거나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그들은 문학이라는 작품을 선사하면서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향유하기때문이다. 모든 물질적 작용들은 문학이라는 작품아래에서 외재적으로 형용할수있는만큼 문학의 대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필연적으로 있었다. 문학의 글귀나 성분 자체도 주어지거나 정형화된 규칙을 반대하기위해서 새로운 변형을 시도하려는 지극히 정서적인 모험이다. 모든것이 수치화되고 측량되고 정해지고 법치화된 이 사회에서만큼은 문학은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해낸다. 항상 우리사회에 딱딱하고 논리에만 앞서있는 사람 몇몇을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막연히 감정이 드리워지는것에는 솔직하지못하며 그 감정을 상황에다가 섞어서 논리에 맞아야한다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고기 불판을 방금 엎질러서 아쉬워하는 사람에게 빨리 불판이나 치워야하는게 논리에 맞다며 윽박지르는것과 같이 말이다. 인간은 수학이나 문자나 기호따위가 아니다. 사람이라는 복합적인 존재를 정량화하고 체계화 할수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하기에는 오류가 너무 많다. 사람은 일관적이지 못하며 불균형적이며 예측불가능하며 때로는 즉홍적이다. 그런 존재를 구성하기위해서 쾌쾌한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넥타이 사무원으로, 쇠가 맞부닥치면서 터질듯한 굉음이 울리는 공장의 노동자로써,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노력하는 수험생과 같이 사람이라는 다채로운 존재는 사회에서만큼은 저렇게 무언가로 규정되어있다. 보이지않는 실타래가 팔과 다리에 연결된채로 공연장 뒷편에서 조종하는듯하는 처량함이 현대사회의 개인들에게 드러난다. 그러나 곧 자발적인 의지라고 스스로 되내이며 살아가야하는 숙명은 거부할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