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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란

02.Friday 3:13_수수

취향이란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

사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펜을 들었다 놨다 썼다 다시 쓰기를 몇 주간 반복했다. 취향 전성시대 아닌가, 모두들 본인만의 마이크로 한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 취향을 저격하기 위한 마케팅이 수도 없이 나오는 이 시대에 내 취향이 뭔지 쓰는 게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취향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막연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도출해서 그렇게 정의하는 순간 그 정의에 어긋나는 부분이 생겨날 것 같고 내 정의를 증명하지도 책임지지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굉장히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Pink Floyd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앨범 커버가 생각났다. 프리즘. 누구나 ‘수많은’ 각자만의 빛깔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꽤나 분명한 색깔 하나로 보이는 이들도 있겠으나, 솔직히 그게 전부일지 어떻게 아나. 바라보는 그 면이 그런 색일 수도 있는 거고, 그냥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 그냥 그렇게 단정 지었을 수 있고, 아님 그 사람이 그 빛깔만 보이도록 의도했을 수도 있고. 어떤 상황 때문에 그 색으로 보일 수도 있고. 아무튼 누구에게든 수많은 빛깔이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도 그런 게 아닐까 수많은 취향이 숨어있지만 내가 처한 상황과 그 순간의 기분 그리고 공간 함께하는 사람 등 다양한 이유로 취향이 달라지는 것만 같다. 취향은 어쩌면 아주 무거운 단어가 아니고 사실 아주 가벼운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자연스러운 순간을 만들어주는 모든 것들을 좋아한다.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질 때쯤 나는 보사노바가 듣고 싶어 진다. 거리에 벚꽃과 개나리가 언제 폈는지 모르게 펴있을 때 경쾌한 색상의 옷을 입고 싶다. 밖에 나가 앉아 따뜻하고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샹송 같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낯선 발음의 음악을 찾아 듣게 되고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순간처럼 즐긴다. 보통 이럴 땐 봄이 왔다는 것이다.


햇빛이 더 뜨거워지면 하얀 옷을 입고 The Brummies의 <Sunshine> 같은 경쾌한 음악을 틀고 휴가를 떠나고 싶어 진다. 이쯤엔 꼭 선글라스를 하나 또 사고 싶어 두리번댄다. 때에 따라 큰 선글라스를 끼긴 하지만 안경만치 작은 선글라스가 좋다. 보통은 따뜻한 음식과 음료를 즐기지만 더운 날 마시는 차가운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 아주 차가운 새콤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좋다. 그러다 너무 더워지면 집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 보기를 즐긴다. 이때쯤엔 낮도 길어져 하루를 더 길게 쓸 수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감성에 젖는 밤이 꽤 많아진다.


날이 조금 서늘해지며 하늘이 정말 파래지는 가을,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계절이다. 내가 좋아하는 미디엄 템포의 음악(지금 생각나는 미디엄 템포의 음악으로는 윤상의 <넌 쉽게 말했지만>이 있다. 조원선 버전을 조금 더 좋아한다)이 딱 어울리는 계절이기도 하고,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과 같은 약간은 어려운 책들도 술술 읽히기도 하며, 가장 좋아하는 올리브색의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빳빳하고 두꺼운 올리브색 트렌치코트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아빠가 사준 까만 가죽 재킷 그리고 단정한 톤의 체크 재킷들과 화려한 머플러, 스카프까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옷들이 거의 가을 옷이다.(사실 봄에도 입지만 가을에 입었을 때의 맛이 나지 않는다.) 내게 그 자체로 편안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가을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을이 특히 편하고 좋다.


바람이 더 매서워지면 풍성한 사운드로 가득 찬 재즈가 듣고 싶어 진다. 색소폰 소리는 로맨틱한 연말을 기대하게 하고, 바디감이 있는 묵직한 와인이 생각나게 한다. 언제 그렇게 목을 내놓고 다녔나 싶게 목을 꼭 가려주는 것을 좋아하고,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니트를 즐기게 된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벤 스틸러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와 같은 하얀 눈이 나오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위에 늘어놓은 것들이 그 순간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라 좋아하는 것들이라면, 나라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6년 전 알람 소리가 그렇다.


6년 전엔 내가 좋아하는 노래로 알람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때 내 알람 소리는 이소라의 <운 듯>이었다. 읊조리며 부드럽게 시작되는 도입부가 들려오면 ‘어디서 들리는 음악 소리지’라는 생각이 들 때 눈을 뜨고, 약간은 음악을 감상했다. 그렇게 일어나면 몸이 좀 개운했다. 내 상태를 자연스럽게 바꾸는 게 좋았다. 아이폰으로 핸드폰을 바꾼 후 6년간 매일을 기본 알람 소리에 일어나지만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저질체력인 나의 아침에 시끄러운 기본 알람이 맞지 않고, 그래서 돌이켜보면 조용한 알람은 나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요소이자 지금은 놓고 살고 있는 내 취향이었을 수도 있겠다.


내 생 단발머리는 나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 난 머리를 하러 가면 꼭 반듯하게 자르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약간의 층을 내어 좀 길어지면 뻗치게끔 잘라달라고 하는데 내 머리처럼 얇은 모질의 단발에서 층을 내면 지저분해진다고 말리는 분들도 많고, 층이 났지만 정직하게 동그랗게 떨어지는 머리를 만들어주시기도 한다. 드라이하는 것도 안 좋아해서 드라이도 하지 말아 달라고, 말려만 달라고 꼭 이야기하는데 ‘정말 특이한 주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헤어 디자이너분들이 꽤 많다. 원하는 대로 삐쭉한 머리가 되지 않으면 그냥 옆머리를 눌러 핀을 꽂아 삐죽 뻗치게 한다. 살짝은 거칠어 보여도 괜찮다. 아주 얇은 내 머리가 층층이 차이를 두고 가지런한 듯 아닌 듯 자리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쩌면 이 머리는 자연스러움이 취향인 나를 표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들과 어울리는 것 그리고 나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

참 이렇게 적고 나니 별게 아닌 것 같다. 아마 많은 이들도 나와 비슷하게 본인만의 취향이 계속 달라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내 취향이라는 것이 사실은 나만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특별해서 특별한 취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고, 사실은 보통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때에 비슷한 것들을 즐기는 게 아닐까. 취향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던 건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 그랬던 건데, 이미 나만의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정말 내 취향이 모여 정말 나라는 사람의 색깔과 향을 만들어내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뭐가됐든 상관없다. 나만의 취향이든 아니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으니 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의 취향은 우리도 모르게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의 취향에 귀 기울이며 특별한 순간들을 만들고 그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을 살면 행복하지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모든 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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