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이야기 3
1995년에 개봉된 영화다. 나는 자살에 대한 철학적, 시대적, 종교적, 사회적, 법률적, 의학적 논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자살은 한 인간의 삶과 생명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알콜중독자가 스스로 삶과 생명을 파괴하는 절망적 우울함을 20세기 말 자본주의에 중독된 세상, 중독된 도시, 중독된 사람들, 희망 없는 미래와 연결해서 보여주는 영화다.
원작자 존 오브라이언의 절판된 소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프로듀서 스튜어트 레간이 2000천 달러에 판권을 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이크 피기스가 감독했다.
원작자인 존 오브라이언은 19살에 고교 동창인 리사 커크워드와 결혼했다. 20살 무렵부터 알콜중독 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아이 없이 13년 결혼생활 후 이혼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완성되기 전, 입원했던 병원에서 나온 며칠 뒤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는 30대 초반 젊은 나이로 술에 빠져있던 알콜중독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원작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듀서 스튜어트 레간이 원작 소설의 무엇을 보고 판권을 샀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원작 소설을 떠나 감독의 것이다. 따라서 마이크 피기스 감독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살펴본다.
영화는 알콜중독자가 꿈꾸는 허망한 자살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팅 특유의 건조하고 차가운 노래가 지나치게 영화를 허무하고 우울하지만,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분위기로 몰아간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알콜중독자가 꿈꾸는 허망한 자살 판타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팅의 노래로 드러내려고 한 것이리라.
주인공 벤은 알콜중독자다. 왜 알콜중독이 되었는지 영화는 밝히지 않는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혼과 “난 그 아이 아빠야”라는 대사 등으로 얼핏 알콜중독과 연결될 수 있는 단서를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구조적 완벽을 위한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알콜중독 치료와 일상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 시나리오작가였던 벤은 알콜중독으로 친구와 가족과 회사에서 퇴출당한다. 어느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성이 “술을 줄이세요.”라고 하자 벤은 “차라리 숨을 덜 쉬라고 하지”라며 콧방귀를 끼면서 조롱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재산을 처분한 뒤 라스베가스로 간다. 술 마시다 죽기 위해서다. 다소 현실감이 부족한 알콜중독자의 판타지다. 그래서 감독은 그 속에 상징과 은유를 섞어 넣어서 메시지를 만든다.
라스베가스는 도박과 술과 향락의 도시다. 마피아였던 벅 시걸이 만든 미국이 자랑하는 자본주의 도박과 향락의 상징과도 같다.
벤은 알콜중독으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자신의 삶이 끝나버렸다고 믿는다. 그래서 치료와 삶의 회복이 아닌 붙어있는 생물학적 생명을 마감하려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은 알콜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또는 벗어나지 않겠다는 망상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자 존 오브라이언의 세계관이기도 할 것이다.
주인공 벤이 라스베가스로 가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중독된 도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박, 술, 향락, 자본주의, 그리고 온갖 것에 중독된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속에서 어떤 통제도 없이 마음껏 술을 마시다가 죽겠다는 판타지를 실행하려는 것이다.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벤은 거리의 여자 세라를 만난다. 세라 역시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벗어날 수 없는 착취와 폭력에 중독된 여자다. 그녀는 자신을 폭행하면서 매춘으로 벌어온 돈을 착취하는 유리에게 칼을 쥐어 주며 그으라고 자신의 엉덩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벤과 세라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벤은 삶이 끝났다는 망상으로 붙어있는 생명을 마감하려는 것이고, 세라는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착취와 폭력에 중독된 상태지만 삶이 끝났다는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벤과 세라의 만남과 사랑은 극명하게 같으면서도 다르다.
벤의 사랑은 붙어있는 생명의 본능적인 작용이다. 하지만 세라는 삶을 보듬고 있기에 온전한 사랑을 원한다. 서로 다르다. 다만 두 사람은 세상에서 소외당한 외로운 존재라는 것만 같을 뿐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사랑은 어긋날 수밖에 없고 비극으로 끝날 운명이다.
벤은 세라에게 동거하는 조건으로 절대 술을 그만 마시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에게 삶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는 온전한 사랑을 원하기에 결국 벤에게 병원에 가자고 한다. 병원에 가자는 말은 다시 삶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그것으로 사랑은 끝난다.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세라에게 벤은 집에 여자를 불러 정사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사랑은 삶을 회복할 수 없는 마지막 본능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헤어진 두 사람은 외로움에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며칠 뒤, 세라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어느 여관방에서 벤은 죽어가고 있었다. 세라는 벤에게 묻는다. “내 도움이 필요해요?” 벤은 대답한다. “아니”
세라의 도움은 삶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벤은 “아니”라고 거절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랑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신파이고 원작자의 겉멋이기도 하다.
죽어가던 벤은 마지막 술 한 잔을 마시고 세라와 정사를 나눈 후, 생을 마감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 정사 장면으로 감독은 알콜중독자의 자살 판타지와 미국식 신파를 완성 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삶이 사라진 자의 사랑은 죽고 온전한 사랑을 원하는 자의 사랑은 그래도 세상에 남는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벤과 세라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던 밤거리에서 구원받으라며 전단지를 나눠 주던 두 명의 수녀가 무엇에 중독되었다고 믿기에 등장시킨 것일까?
거절하는 세라를 강제로 성폭행하는 대학생들은 또 무엇에 중독된 것일까?
세라를 폭행 착취하던 유리의 죽음, 그를 죽이는 갱스터들, 영화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하거나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스팅의 우울한 노래와 화려한 라스베가스 도시 풍경이 20세기 말의 암울한 절망을 드러낼 뿐이다.
자본주의에 중독된 세상, 중독된 도시, 중독된 사람들, 희망 없는 미래를 알콜중독자의 자살 판타지로 드러내는 영화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