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섭 Jul 13. 2024

"비보이" 김유섭/이경준 시인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사랑이란 것을 울부짖는 노래."​​​

비보이 - 김유섭(포지션)


이따위 세상에 사랑



피 맛 나는 사랑이 좋아.

타액 섞인 위스키 더블

날마다 배달되는 챗봇 실루엣 따위 쓰레기통에 처넣지.


서로의 눈동자 들여다보며

웃는 건

가슴으로 안아 춤춘다는 것, 목숨 건다는 마음 짓.


이리와 너를 만들어 줄게

사랑은 전속력으로 달려와

죽어도 좋아.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펑 사라져 버릴 수 있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쿵쿵 타들어 가는 심장 박동, 나란히 발자국 찍으며

불구덩이 모래사막이라 해도

맨발로 걷는 거야. 그치?



여는 시 '이따위 세상에 사랑'이 시집 전체를 꿰뚫는다. 시인이 체감하며 목격하는 현실은 '이따위'밖에 되지 않는다. 순환질서를 따르는 자연,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순환질서를 따르지 못하고 수직으로 추락하듯 자멸하고 있다. '황금'으로 상징되는 물질, 자본만능주의적 욕망이 인간을 획일적으로 녹이고 있다.


시인은 이따위 세상에서, 추억이자 마지막 희망으로 '사랑'을 외친다. 시집의 작품 순서는 철저하게 계획된 배치로 보인다. 첫 시, <붉은 비>는 시인이 파악한 세상의 전체적 배경을 설정한다. 약한 인간의 피가 흘러내리는 흥건한 세상. 그 뒤에 배치된 작품 <복서>는 그런 세상에서 신념의 주먹을 굳게 쥔 주체를 형상화한다.


<발광다이오드 별>에서는 이따위 세상에서 '자연물인 척'하는 존재로 위안삼는 세태를 그린다. '곪아버린 탄소 덩어리 떠다니는/노란 대기권을 향해 솟아오른 스테인리스 첨탑/보이지 않는 꼭대기에서/해체된 달빛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라고 읊는 세상에서 인간은 '황금 사슬에 묶인 굽은 척추'로, '별인 척,/지갑에서 발광다이오드 조명을 꺼낸다.'는 소비 행위로 위안 받으려 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실체를 대체한 껍데기-이미지가 실체로 작동하는 세계'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잡고, 모든 것을 약탈하고,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모든 것을 조작하고자 한다. 보고, 해독하고, 배우는 것은 그들에게 별 관계가 없다. 대중에게 유일하게 와닿는 것은 조작하기이다. 조작자들(그리고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이 통제불능의 변덕에 질겁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화적 광경에만 대중들을 견습시킬 것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p.131"


김유섭 시인의 '주먹'은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조작자들'을 겨눈다. 한 개인이 자연적 실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황금 목줄'에 매달려서 연명하거나 기어올라가는 구조를 굳혀가는 점을 때린다. 이렇게 가로축 계급으로 나뉘고, 추락하고 마는 세로축의 질서를 때린다.


인간의 실존적 움직임,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언제나 '춤'이다. '반지하에서 질척거려보다가/뻥 내쫓겨, 시멘트 바닥을 굴러/비보이 춤을 춘다.'는 비보이는 극단의 좌절 앞에서도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 <그리스인 조르바>중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조르바와 겹친다. 또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레볼루션 No.3>에서 마음껏 춤추는 주인공들이 겹친다. 이 시집의 4부의 첫 작품, <쿠바에서 룸바>에서도 '춤'이 인간 존재를 증명하는 상징으로 그려진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이기에 치렁거리는 그림자 벗어던지고/엉덩이 흔들어 스텝을 밟는다.' 그리고 그 춤은 '다시 아침이 오지 않는다 해도'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격렬한 몸짓으로 인간임을 증명한 사람에겐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남는다. 함께 삶을 춤췄던 이들을 그리워하고 기억하기. 4부(II)의 시들은 '기억으로 드러내는 사랑'을 읊는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자연 질서를 깬 욕망에게 윽박지르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사랑이란 것을 울부짖는 노래."


[출처] 비보이 | 김유섭 시집|작성자 정원사

작가의 이전글 이상(李箱)의「오감도」 87년만에 제대로 읽었다(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