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예, 괜찮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Yes! Yes! 남에겐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른들에게도, 회사 상사에게도, 선후배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심지어 불만이 있어 클레임 전화를 거는 순간까지도.
나는 남편의 ‘예, 예’를 할 때의 표정과 말투를 복제 수준으로 따라 할 수 있다. 약간 어깨가 구부정해지고, 얼굴도 살짝 숙인 채로 ‘예, 예’ 할 때마다 격한 끄덕임을 한다. ‘넵’이나 ‘옙’ 같은 단호한 말투의 동조가 아니라 말투까지도 배려가 넘치는 거다. 반면 나는 성격이 워낙 급해 상사의 지시에는 ‘넵’이라고 말하고, 일단 행동으로 움직인다.
이런 차이라고나 할까.
대답하는 것도 이렇게 다르니, 나는 그의 ‘예, 예’가 점점 불편해졌다. 왜? 한 번은 좀 단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예’에 ㅂ이라는 받침 하나 정도 붙이는 게 큰일 날 일인가.
Covid-19로 부쩍 재택이 늘어난 우리 부부는 가장 가까이서 서로의 일하는 방식을 밀착할 수 있었다. 나는 거실이나 식탁, 남편은 서재에서 일을 하는데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의 서재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어김없이 ‘예, 예’ 사람 좋아 보이는 소리만 반복됐다.
그러다 거실로 나오면 간단히 오늘의 안부를 주고받고 결정이 시급한 건에 대해 논의도 한다.
‘오늘 많이 바빠?’
‘곧 어머님 생신인데 선물은 뭘로 할까?’
‘주말에 잠깐 양평 고모댁이나 다녀올까?’
‘오늘 점심 뭐 먹지? 시켜먹을까?’
‘이번 성과급 들어오면 어른들 용돈 좀 드리자’
‘아 넷플릭스 안 볼 거면 해지해’ 등등 사소한 것부터 잔소리 성의 대화까지.
주로 밖에 나가자고 제안하거나 어른들을 챙기는 쪽은 남편이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요리나 넷플릭스와 같은 소소한 제안은 내가 했다. 사소하고 흔한 일상의 대화 주제이지만 둘 중 한사람의 제안에 거절로 끝나면 그날은 한 집에 있는 게 불편한 날이 되어 버린다. 나는 일단은 들어는 보고 의견을 제시하는편이라면, 남편은 내 제안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세번은 곱씹어 오타가 있는지, 효과적인 방안인지를 검토하는 아주 까다로운 편이었다.
매우 서운했다. 밖에서는 남의 눈치 보고, 배려하느라 거절 한번, 싫은 소리 한 번이 어려우면서 내가 제안하는 사소한 요청은 단칼에 거절하는게. 지금은 신혼때에 비하면 수년간의 투쟁 끝에 의견을 모으는 과정들이 많이 나아진 편이다.
신혼 땐 남편이 어릴 적 라면을 많이 먹어서 집밥이 좋다며 밥은 꼭 집에서 해 먹자고 했다. 그 말에 연민을 느껴 4년 동안은 남편 생일마다 잊지 않고 김밥을 싸고 미역국도 꼭 끓여줬다. 남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거다. 지금도 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그때처럼 어리고, 어리석지는 않다. 어느새 나는 듣기실력이 향상되었고, 진심과 포장을 구별해내고 있었다. 이제는 하는 말마다 그대로 듣지않고, 말의 본심을 고민하게 된다. 남편은 종종 내가 해준 밥이 맛있어서 외식을 안 해도 되고, 내 피부가 좋아서 화장품이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젠 그런 말 들으면 대꾸도 안 나온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말 뒤에 가려진 진짜 의도에는 공감함다는 암묵적 동의였다.
그래도 Yes! Yes! 를 따발총처럼 남발하면서 내가 하는 것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는 것은 장기적으로 부부 관계의 신뢰에 균열이 생기는 문제임은 확실하다. 거절은 결국 내 결정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에 계속 거절만 당할수는 없었다. 우리는 배우자니까 적어도 동의가 어려울 땐, 협상을 통해 절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원하는 방향을 알았다면, 그 안에서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하는 거.
결국 우리는 둘 다 성격 급한 직장인이라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또 거절했고, 거절의 신호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하루 종일 회사와 “예, 예” 앵무새처럼 커뮤니케이션하는 남편이 나에게는 안된다고 득달같이 달려들 때는 유치하지만 ‘나도 응징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자고 결심했다. 자꾸 거절하는데 굳이 뭐하러 일일이 물어볼 것이며, 상의 없이 결정해거렸다. 남편이 제안하는 것마다 나도 똑같이 거절해 버렸다. 한마디로 이판사판 나만의 방어책이었다.
사소한 변화지만, 지금은 상의가 꼭 필요한 사항 외에는 각자 알아서 할 수 있게끔 했다. 공식적으로 이렇게 하자고 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 범위내에선 노 터치. 특히 남편이 가장 예민해하는 지출 부분에서 나의 소비 내역은 미리 묻지말고, 퇴근 후 집에 쌓인 택배 상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나 역시 집밥 매니아를 위해 매일은 힘들더라도 의식적으로 쌀을 안치고, 찌개를 끓였다. 지금도 남편은 식당을 차릴 정도로 맛있다고 빈말은 계속 하지만, 나 역시 알면서 속아준다.
궁금하다. 우리집 남자만 이런건지.
왜 우리집 남자는 집 밖에서와 집 안에서의 행동이 다른 걸까. 왜 그걸 우리 와이프들만 봐야 하는지 남편의 실체를 나만 아는 게 억울할 때도 있다. 안에서는 얼마나 더 잘나고 당당하고 목소리도 큰지, 정말 남편의 팀장님과 본부장님도 아셔야 하는데 말이지. 우리남편이 얼마나 자기 의견이 확실한 뚝심있는 남자라고요.
우리 집 ‘예예 앵무새’는 지금도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질 않는다. 내가 흥분한 티라노사우르스 상태까지 오면 어쩌다 한 번은 넘어가 준다. 그리고 마치 본인이 나의 상사인 양, 본인이 나에게 과분한 배우자인 양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내 말에 반박하려고 하는데 나도 이 남자와 살기위해 더 세질수밖에 없었다.
“나를 회사 동료라고 생각해주면 안 돼?”
“으.. 응?”
“제발 그냥 좀 넘어가 달라는 말이야”
“알았어”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뭔데?”
“내가 많이 예민한 날엔, 내가 니 회사 본부장이라고 생각해줘.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다 적극적으로 듣고 쓰고 실행해줄래?”
“그래그래. 여보도 본부장해!”
가끔은 가까운 것 보다 거리감 있는 사이가 나을 지도 모른다.
내 말에 머리 굴리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주고
잘 보이려고 노력도 해주고
말도 안 되는 말도 수긍해주는.
내말을 적고 쓰고 좀 끄덕여줄래?
에필로그
내 배우자에게 닮고 싶은 모습이 있었다.
나보다 어른스러웠고
남을 잘 배려하고
경제관념이 확실하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
내가 부족한 부분이라 내 삶을 완전하게 채워줄 거 같았다. 그게 힘들게 하는 순간이 올 줄 몰랐다.
나보다 어른스러웠던 그 모습은 너무 어른스러워서 마치 교장선생님 같이 한마디면 될 말도 돌림노래를 한다. 그걸 듣고 있자니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마치 땡볕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남을 잘 배려하는 탓에 남에게 배려라는 걸 주고 되려 상처를 받았다. 고작 이길 수 있는 게 나 하나뿐이라는게 미련했다. 그래서 져주고 싶었다.
‘피부가 좋네, 뭘 입어도 이쁘네’라는 말은 그의 경제관념으로 비롯되어 화장품과 옷을 안 사게 하려는 그의 치밀함이었다.
마음이 넉넉하다 못해 넘쳐서 남만 챙기느라 바빴고, 나에게 내어줄 마음은 없어보였다.
남편이 조금 변한 것 같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나에 대한 인식이 변한 거다. 그가 배려해야 할 울타리 안에서 배우자가 된 순간, 나는 그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거다. 나도 같이 변하고 있다. 남편의 우선순위의 1등에서 자꾸 후 순위로 밀려나는 게 싫었다. 남편이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마음을 베풀수록 내 마음이 오히려 더 좁아졌으니 내 마음 그릇이 좁아진 거다.
어디 내놓아도 안심되는 내 배우자랑 이런 피곤한 감정 소모를 하고 있다. 고작 네 배우자가 되었다는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