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다.
나는 지금 집에 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교회로 갔을 것이다.
지금 내 안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이 올라오고 있지만 오늘은 그 마음을 피해 가지 않고 견뎌 보려고 한다.
나는 이른바 모태신앙이다.
그것도 꽤 철저한 모태신앙.
어릴 때부터 교회는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예배에 빠지는 일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를 한 주 빠지면 그 주에는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았다.
예배 시간에 교회를 나오지 않아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신앙이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어릴 때 나의 언니가 죽었을 때도 엄마는 그 일을 종교적인 이유로 해석하며 나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를 탓하기는 어렵다.
엄마는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자녀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엄마의 삶은 일제시대와 6·25를 지나온 세대였다.
불안과 두려움이 삶의 바닥에 깔려 있는 시대를 살았다.
언제 무엇을 잃어버릴지 모르는 삶 속에서 엄마는 종교를 통해 마음을 붙들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공식이 나에게까지 그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공식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따져 보고 싶지도 않았다.
예배에 빠지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마음,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마음.
그 두려움이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머리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말하곤 했다.
“괜히 불안해하지 말고 그냥 적당히 교회 다니면 되잖아.”
그렇게 두려움을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를 찾아야겠다’는 각성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나의 신앙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내 안의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믿고 있던 신은 어쩌면 아주 속이 좁고 편협한 존재였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나누기 좋아하고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의문을 가지면 그것을 교만이라 말하고 죄책감을 주며
인간의 불안을 이용해 두려움으로 통제하는 존재.
어쩌면 나는 그런 신을 믿으며 오랫동안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 세계를 깨부수지 못한 채
답답하다고 불평만 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문득 『데미안』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어쩌면 지금 나는 그 알을 깨고 나오려는 중인지도 모른다.
삶은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제 내가 아닌 것은 하나씩 벗어 던지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엄마에게 들은 신이 아니라
나의 신을 만나기 위한 길.
어쩌면 나는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