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소비자라면 누구나 이런 걸 좋아할 거다. 그게 뭐가 됐든 돈을 주고 서비스와 물건을 이용하는 거라면 말이다. 이와 관련해 부유층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 대략의 기준 같은 게 있었다.
1인당 3만원이면 아주 좋은 식사. 1인당 10만원이면 아주 좋은 뷔페. 하룻밤에 20만원 정도면 아주 좋은 호텔. 한 벌에 10만원이면 아주 좋은 셔츠. 불과 2~3년 전만 해도 이런 게 대충은 들어맞았다. 좀 비싸긴 해도 내가 예상하고 기대한, 그 돈에 맞는 ‘와 좋다~’하는 서비스와 품질이 따라왔던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돈의 가치가 그야말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걸 느낀다. 미국에 연수 온 사람들끼리, 정말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다.
“미국 사람들 너무 불쌍해.”
심각한 뜻은 아니고 어떻게 이 돈 주고 이런 음식과 물건을 사느냐, 뭐 이런 의미다. 10개월 가까이 미국에 머물면서 식당이나 쇼핑몰을 이용하다 보면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온다. 환율을 제외하고, 한국인이 쓰는 1만원을 미국인이 쓰는 10달러로 놓고 봐서 말이다.
물론 아주 고가의 레스토랑이나 명품 브랜드는 미국에서도 엄청 좋겠지만, 우리가 비교하는 건 일반적인 대중이 일상에서 소비하는…한국에서 경험했던 같은 카테고리의 음식과 물건들이다.
예를 들어 토마토 파스타와 리코타 치즈 샐러드, 카레·햄버거·샌드위치 같은 메뉴들, 셔츠와 바지. 화장품. 접시와 도마, 커튼과 쿠션, 소파와 침대 매트리스…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한국과 미국을 비교할 수 있다.
음식 맛이야 문화와 지역 차이가 있으니 같은 메뉴라도 내 입맛대로 평가할 순 없겠지만, 저렇게 적은 양에, 성의없이 담아내는데 2만 5000원이라고? (게다가 의무적인 15~20% 팁까지!!) 이 정도 디자인과 품질인 옷이 6만원이라고? 뉴욕·LA·시카고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물건은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인데, 미국의 제조업 분야는 확실히 오랜 기간에 걸쳐 쇠락한 느낌이 든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디자인이고 품질이고 기능이고 미국 사람들이 ‘멋지다 예쁘다’며 만족하는 기준이 한국 소비자 기준보다 떨어진다는 걸 많이 느낀다. 식당이나 카페, 백화점, 대형 쇼핑몰의 인테리어 역시 한국이 같은 규모의 미국 도시들보다 훨씬, 정말 훠어어얼씬~~~훌륭하다.
관광 분야도 마찬가지다. 나는 싱글이고 주로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호텔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솔로 여행의 힘든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안전함, 편의성, 쾌적함, 청결함 등이 중요해서 밥을 한 끼 안 먹더라도 되도록 4성급 호텔에서 머문다. (5성급은 절대 무리무리)
관광지의 4성급 호텔들은 비수기에도 하룻밤에 200~300달러는 넘는다. 현재 돈을 못 버는 내게는 아주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런 호텔들의 상태(?)는 늘 실망스러웠다. 코로나 기간을 거치면서 관광산업에서 많은 직원들이 해고됐다고는 해도, 힐튼·메리어트·쉐라톤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4성급 호텔들의 청소 상태는 솔직히 충격적이다.
미국 호텔 중엔 카펫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은데 직전 투숙객의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바닥에 붙어있는 건 기본이다. 침대도 겉으론 깔끔해 보이지만 베개나 이불을 걷어보면 머리카락이든 뭐든 뭐가 꼭 나온다.
좀 오래된 호텔의 경우 화장실에는 검은곰팡이가 슬어 있거나 샤워기 헤드나 변기 배관 부분에 녹슨 곳들이 보이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이곳에서 만난 친한 후배 부부는 유명 호텔에서 바퀴벌레가 나와 기겁을 했다고 한다.
밤에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카락인 채로 버틴 경우도 많다. 헤어 드라이기에 먼지가 하도 껴 있어서 도저히 사용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 커피머신은 십중팔구 물 넣는 투입구에 먼지가 그대로 붙어있어서 그냥 포기하곤 한다.
어매니티라고 부르는 편의용품들도 빠르게 사라져 가는 추세다. 고급호텔의 경우 샴푸·컨디셔너(린스)·바디로션 등이 유명 브랜드의 제품들로 구비돼 있었지만, 환경 문제를 이유로 세계적으로 점점 일회용품 대신 대용량 제품을 부착해 놓고 리필해서 사용하게 한다.
리필 자체야 상관없는데 정작 놀란 건 어매니티 제품들의 품질이 호텔 등급치고 너무 떨어진다든가, 있을 법도 한데 전혀 편의용품을 마련해 놓지 않은 호텔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권 호텔에서 실내 슬리퍼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나는 일회용 슬리퍼를 꼭 싸들고 다닌다) 치약칫솔·빗·면봉·샤워가운·와인잔과 와인오프너·유리잔·금고 등 예전 비슷한 가격대의 호텔에서 늘 봤던 편의용품이 없는 경우가 꽤 많다. 특히 무료 생수를 제공하지 않는 호텔이 많아서 500㎖ 페트병에 5000~8000원을 쓰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들고 들어와야 한다. 이것들이 없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하룻밤 30만원 짜리 호텔에 달랑 비누 하나만 있다니 처음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손에 잡히는 물건뿐 아니라 사람의 서비스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미국의 서비스가 (돈 내는) 손님에겐 무릎이라도 꿇는 한국의 과한 서비스와는 다르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미국에서 느낀 서비스업 직원들의 태도는 딱 여행 가이드 정도인 것 같다.
친절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안내’하고 ‘설명’해주는 느낌이지 손님을 받들어주거나 기분을 맞춰주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다. 실제 생활해 보니 손님이 직원에게 서비스 단계단계마다 ‘땡큐’를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항공사든 호텔이든 식당이든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론 이런 관계가 마땅하고 기분도 더 편한 것 같다.
미국에서 경험한 물건 품질과 서비스가 한국보다 못하게 느껴지는 건 여러 이유가 있을 거다. 생산기지가 대부분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 쪽인 만큼 물류비와 직결된 거리가 더 멀고, 미국 내 인건비도 매우 높고, 코로나 이후 경제 성장이 더뎌 모든 게 긴축모드고, 서비스 직종 인력이 많이 해고된 상태고 등등.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라고 다르진 않을 거다. 결국 앞으로 한국 소비자들도 이제까지 쓰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쓰지 않는 한, 어떤 이유에서든 품질과 서비스 기대 수준을 조금씩 낮춰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