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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15. 2023

잘 나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처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었을 땐 어이가 없었다. 그리스 트로이 전쟁이 배경인 이 장편 서사시엔 아킬레우스·오디세우스·헥토르·아이네아스 등 유명한 인간 영웅들이 수없이 나오는데, 지고 이기는 것, 죽고 사는 것이 사실상 신들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분명 체력과 실력이 월등히 낫고, 전략을 기가 막히게 짰는데도 제우스·헤라·아테나·아폴론·아프로디테 이런 신들의 선택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거다. 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해도 신들이 편애해서 도와주면 사는거고, 아니면 날아가던 화살이 거꾸로 돌아와서라도 죽는거다. 이런 허무하고 어이없는 일이 있나.

     

트로이 전쟁을 그린 그리스 아킬레온 궁전의 벽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달리는 장면.

그런데 갈수록 이게 그리스 신화가 가진 매력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사라는 게 결코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기술과 지식을 통해 많은 것을 예상하고 컨트롤하게 됐다. 예방주사를 맞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널목에서 녹색 불이 켜지면 차들은 멈추고, 앱을 열면 열차 출발과 도착이 수시로 업데이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 생활 동안 내가 어쩌지 못할 변수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 언젠가 연수자들이 모인 적이 있었는데 모두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다”며 하소연을 했었다. 실제 연수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예로 들어보자.     


◇ 멀쩡히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돌아와 보니 사이드 미러 하나가 부서져 있었다. (무작위로 일어나는 차량 파손 사고가 꽤 있다)

◇ 아마존에서 물건을 잔뜩 주문했는데 물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배송사고도 빈번하다)

◇ 온다던 버스가 1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공지도 없이 정류장이 폐쇄됐다)

◇ 산책길에서 개가 달려들어 패딩 앞부분이 다 찢어졌다. (개주인이 연락하라며 준 번호는 가짜였다)

◇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선생이 너무 차별해서 아이가 우울증에 걸렸다. (현금 기프트 카드를 줬더니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 지붕에 벼락이 떨어져 집이 불타버렸다. (보험회사에선 끝까지 보상 잔액을 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 학교에 가야 하는데 아파트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해 복도 셔터가 차단돼 버렸다.

◇ 환율이 자꾸 미친 듯이 오른다;;;     

한인들이 모인 온라인 방에는 미국 생활 중에 갑자기 당한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따지고 보면 우리 잘못은 하나도 없다. 그냥 나쁜 일이 일어났고, 당해버린 거다. 절대 겪고싶지 않은 일들이지만 예측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억울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수밖에.

 

비록 외국이라서 별의별 일이 더 생기는 것 같지만…우리 인생도 큰 틀에선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이 아니다. 살다보면 생각지 못한 변수가, 갑자기 닥치는 (주로 안 좋은) 일들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도 처음엔 ‘왜 자꾸 이렇게 일이 꼬일까’ ‘정말 힘들어 죽겠네’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결혼이라도 했으면 도와줄 배우자라도 있었을 텐데’ 자괴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고 몸과 마음만 상할 뿐이었다.


결국 언젠가부터는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어떻게 되든 처리하자…이런 마인드로 살게 됐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매 순간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좀 무뎌지고, 체념했다고나 할까.     

일요일 장터에서 한가롭게 과일과 야채를 사는 뉴욕 시민들. 평화로운 일상이지만 사건사고도 많다.

나는 이 체념이 어떤 면에선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겸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나도, 계획을 철저히 짜도, 잘못이 없어도 맘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너무 괴로워하지 않고’ 인정하는 거다.

우리가 종교를 갖고 절대자를 믿는 것도, 삶이라는 게 언제나 내 힘과 의지만으로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게다가 이런 ‘뜻하지 않게 꼬이는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주변에 아무리 잘 나가 보이는 사람도 얼마동안 잘 나가면 반드시 뭔가에 부딪히는 것 같다. 그 사람의 오만과 욕심에 의해서든, 주변 사람과 환경에 의해서든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뤄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금수저로 태어났든 운이 좋았든 만사 평탄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작은 돌부리 하나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고 스스로 주저앉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처음 난관에 빠져본 사람은 더 그렇다) 

이렇게 보면, 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아주 불공평하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에릭 와이너의 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 한 구절.

예전엔 ‘신의 뜻’ 운운하거나, 팔자니 새옹지마니 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거나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많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어쩌면 그게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 내가 모른다는 것’이라고 했듯,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주 특별한 존재인 동시에 당장 1초 뒤에 어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고, 그걸 덤덤히 받아들인다면…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하는 노력들은 더 큰 만족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이러다 또 행운도 따르겠지, 라고.

그리고 남과 일일이 비교하지 않고, 세상을 덜 원망하게 되고, 마음의 분노나 우울도 더 사그라들지 모른다.

다사다난, 바보멍충이, 좌충우돌 외국생활을 통해 나는 전보다 조금은 겸손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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