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의 마음

by 진영솔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최근이다. 그리고 최근의 나는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 잘 살고 있냐고 물으면 그건 아직은 좀 먼 이야기 같고, 그냥 현재에 집중하고 싶다. 현재의 나는 행복하다. 행복한 게 안 맞는 옷처럼 느껴질 정도로 얼떨떨하다. 늘 불행할 때에 글을 써왔다. 상처를 풀어내고 봉합하기 위하여 스스로 기꺼이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내 상처를 누군가 보듬어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택한 것이 글이다. 때로는 일기처럼, 때로는 투사(鬪士)의 마음이 되어 글을 썼다. 그렇게 쓰인 글이 100여 편가량이다. 그래서인지 행복하면 글을 쓸 수 있을지 늘 의문이었다. 불행에 잠식되어 기름때처럼 찌들어 있는 무거운 글만이 나를 살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새의 나는 긴 휴가를 받은 기분이다.(실제로 새로운 회사에 입사까지 한 달가량이 남았다.) 상담선생님께서 늘 하시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일어날 때가 되었기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 이 일이 일어난 것은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유를 찾아 헤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절망스러운 말처럼 들리는지를. 김영하 작가는 아래와 같이 말한 적 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이 발생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러한 일들은 일어난 이유가 없었으면 싶다. 아니 없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행한 일들 투성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어도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다. 여전히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 하루는 시작된다.


인생을 결정적으로 불행해지게 만드는 몇 가지의 강력한 사건과, 인생을 버티게 만드는 수만 개의 평범한 사건이 만나 인생을 이룬다. 지긋지긋한 우울증, 끝없는 자기혐오, 유년시절 정서적 학대, 엄마의 죽음, 아빠의 바람. 확실한 불행들 사이로 평범한 일상들이 수만 갈래로 흘러갔다. 늘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살아갔으나 벼랑아래로 떨어지진 않았다. 공황장애가 극심했을 무렵 과호흡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땅에 발 붙이기였다. 발바닥을 땅에 붙이고 그 감각을 온전하게 느끼며 심호흡을 한다. 과거의 트리거를 벗어나 현재의 내가 바로 지금 여기서 발붙이고 있음을 실감하는 작업이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현재의 평범한 사건들이 발목을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과거를 현재의 내가 이겨냈다. 가끔은 무승부여도, 가끔은 완패하더라도 결국은 짜릿한 역전승을 해내고야 마는. 그런 나를 위해 다시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최근에 나는 더 이상 공황장애 약을 먹지 않는다. 아빠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 엄마를 용서하고 엄마에게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변진섭 콘서트에 가서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을 라이브로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해낸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 선생님은 이런 나에게 드디어 알밤 같다고 표현했다. 알밤은 모양도 둥글둥글 너무 이쁘지만 먹기가 참 힘들지 않냐며, 가시가 가득한 밤송이도 벗겨내야 하고, 윤이나는 갈색 껍질도 벗겨내고 나서야 비로소 알밤 한 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 가시 가득한 껍질을 한 겹 벗겨낸 것 같다고 하였다. 외롭고 축축한 산길에 떨어진 알밤의 마음이 되어 나의 마음을 다시금 바라본다. 참 긴 세월이었다고.


그리하여 나를 조금 더 사랑하기 위하여 고민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나를 사랑하라고 나에게 긴 방학을 준건 아닐지, 모든 일에 때가 있다는 말을 실감하며 글을 쓴다. ‘새들은 왜 날아가나, 바람은 왜 불어오나, 내 가슴 모두 태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오직 사랑하기 위하여 글을 쓴다. 기왕이면 나를 조금 더 사랑하는 여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욕심을 내자면 언젠가는 갈색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솔직하고 노오란 속만 남기를 바라며. 세상의 남겨진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긁어모아 오늘을 또 사랑하고자 한다.


맨들맨들한 양파같이 되고싶어서